[2030 세상]스페셜 생스 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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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최근 회사 송년회에서다. 신입사원들의 장기자랑, 상품을 타기 위해 치열했던 퀴즈를 지나 회사 생활에 대한 사연을 사회자가 라디오 방송처럼 읽는 차례가 됐다.

“저는 이 자리를 빌려서 고마운 선배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입사 첫해, 자신감도 부족하고 매주 아이템 회의에서도 병풍처럼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선배님께서 제 몫을 덜어가 업무를 해주셨습니다. 죄송하고 자책감이 들어 혼자 운 적도 있었죠. 다행히 선배님께서는 아무 말 없이 견뎌주셨어요. 그렇게 7개월간의 프로젝트가 끝나고 그 뒤로도 적응하랴 배우랴 바쁘게 회사를 다녔습니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누구나 신입사원으로 처음 들어오면 회사에서 바라는 1인분의 몫을 하기가 쉽지 않기에 저이도 마음고생을 했었구나, 나에게도 그런 후배가 있었지, 그래도 좋은 선배를 만나 대리가 될 때까지 열심히 다니고 있다니 기특하네, 생각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사연 속 선배에게 일어난 일들이 내가 겪은 것과 너무 비슷했다.

“그러다 올해 초, 그 선배님과 다시 같은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쁘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 시절의 모습을 보신 분과 다시 일하려니 부담스러웠습니다. 열심히 해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선배님이 그때 해주신 ‘잘하네’ 한마디에 그날 하루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제가 멍석 깔아주면 표현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라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사실 제가 사무실에서 늘 샤프 대신 연필을 쓰는 것도, 신입사원 때 선배님께서 쓰시는 게 좋아 보여서 따라 한 것입니다. 선배님, 정말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듣고 나니 단박에 이 사연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며칠 전 뜬금없이 나에게 연필을 선물한 후배의 얼굴도 퍼뜩 떠올랐다. 웬 연필이냐는 말에 그냥 샀다고 어물쩍 넘어가던 그였다. 이 사연은 전체 사연 중 2등을 차지했고, 후배와 나는 꽤 괜찮은 상품들을 거머쥐게 되었다.

선물보다 더 기쁜 것은 후배의 마음이었다. 사실 그 시절의 나 역시 많이 모자랐는데 나를 대단하게 봐준 것도, 신세를 졌다고 생각해준 것도, 그리고 몇 년이나 지난 일을 이렇게 고맙다고 말해준 것도 큰 감동이었다. 더불어 그동안 회사 허투루 다니지 않았구나 싶어서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송년회 후 멋쩍어하는 후배에게 “너는 상품을 타고 싶어서 아주 작정하고 사연을 썼더라”며 놀려댔지만, 올 초 프로젝트 때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더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동시에 마음도 무거워졌다. 후배들에게 마음을 쓸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내가 선배들에게서 받아온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신입 시절 눈물이 쏙 빠지게 혼도 내시고 야근을 불사하며 일을 가르쳐주신 선배님과, 개인적인 일로 회사 일에 집중 못 하고 방황할 때 당신의 흠결(!)을 서슴없이 고백하며 조언해주신 팀장님과, 차원이 다른 시각과 탁월한 업무 능력으로 든든한 의지가 되는 과장님, 그 외에도 신세를 진 선배들이 수없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께 제대로 감사하단 인사를 드린 적이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후배나 동기들에게도 회사 생활을 하며 감사할 일들은 차고 넘친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송년회 사연으로 ‘스페셜 생스 투’ 같은 걸 한 통 써 보냈어야 했다는 후회가 막심했다.

다행히도, 내년에도 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회사 생활을 할 테니 여전히 기회가 있다. 회사라는 조직이 스트레스를 줄 때도 많지만, 이번 송년회의 사연으로 한 해를 돌아보고 있자니 우리가 회사에서 힘들게 일만 한 것은 아니구나 싶다. 누군가의 선배가 되고 누군가의 후배가 되어 함께 울고 웃고 화내고 기뻐하며 이토록 타인의 생에 영향을 미치며 지내고 있는 것이다.

샤프 대신 연필을 쓰는 내 사소한 습관이 다른 한 사람의 습관을 만드는 공간에서 우리는 올 한 해를 함께 보냈고 내년도 함께 보낼 터이다. 며칠 후면 새해가 올 것이다. 인생이란 긴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동료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일상이 연말인 듯 그들에게 ‘스페셜 생스 투’를 전하면서 말이다.

우지희 능률교육 콘텐츠개발본부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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