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응답하라 2015, 추억의 장소는 어디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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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국내옹호팀장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국내옹호팀장
1988년 서울 도봉구 쌍문동 골목길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인기몰이 중이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나의 1988년은 ‘손에 손 잡고’를 ‘손에 돈 쥐고’로 바꿔 주야장천 부르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시대 차가 있다. 그런데도 이 드라마에 푹 빠지게 되는 것은 ‘충만아 밥 먹자’라는 온 세상이 완벽해지는 소리에 동네 이곳저곳에서 놀이를 즐기던 아이들이 일제히 집으로 돌아가는 내 어린 시절 골목 추억과 중첩되기 때문이다.

나의 유년기는 골목길과 아파트의 중간쯤이었다. 살던 곳이 서울 변두리 골목 어귀다 보니 동네 형, 누나들 틈바구니에서 맘껏 놀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그곳 놀이터에서 새겨진 추억도 참 많다. 어린 시절 일기장을 이따금 들춰 본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적힌 ‘참 재미있었다’라는 말에 압축된 충일한 기쁨의 하루들이 쌓여 있다. 이런 날에는 골목이든, 놀이터든, 학교든, 운동장이든 언제나 멋진 추억 속 공간이 함께 있다.

공간을 추억하는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다. 올해 초 나온 독립 출판 잡지 ‘안녕, 둔촌주공아파트’ 3호에서는 1979년 만들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 있는 12개 놀이터가 얼마 전 안전검사에서 불합격하면서 철거되는 과정에서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파트 키드’들이 추억 속 놀이터를 꺼내어 곱씹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나 역시 처음 기린 미끄럼틀을 타던 날엔 집에 들어오면서 현관에서부터 소리를 지르며 엄마에게 자랑했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기린 미끄럼틀을 탔다는 것은 스스로 공포를 극복해 낸 첫 번째 성취였고, 자랑하고 싶은 뿌듯함이었고, 대단한 것을 해냈다는 자신감이었다.”

꼭 기린 미끄럼틀이 아니어도 우리는 모두 친구들과 함께 실컷, 맘껏 놀며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먼 곳으로 모험을 떠났던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은 추억의 장소들 속에서 해같이 빛난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갈 힘이 된다.

그렇다면 2015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에게 추억의 장소는 어디일까?

나는 아이들의 놀 권리 향상을 목표로 ‘놀이터를 지켜라’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 일로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어디서 어떻게 노는지 묻곤 한다. 그럼 이따금 아이들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얼마 전에 갔던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5학년 여자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졸업하고 나면 학교 화장실이 가장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마음 편히 놀 곳이 화장실밖에 없거든요. 재미있었다는 생각도 들겠지만 놀 수 있는 데가 그곳뿐이었다는 게 슬플 것 같아요.”

지난해 만났던 초등학생 남매는 이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짬짬이 놀아요. 그것도 조용히 놀아야 해요.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정도로도 소란스럽다고 혼나요. 점심시간에도 위험하다고 나가서 못 놀게 해요. 학교가 끝나도 야구부 때문에 운동장에서 놀 수 없어요. 아무래도 우리가 가만히 책만 읽기를 바라시는 것 같아요.”

놀이터는 어떠한가. 올해 초 안전관리법에 따라 전국에서 1500개가 넘는 놀이터가 폐쇄되었고, 현재까지도 833개가 여전히 봉쇄 테이프로 꽁꽁 묶여 있다. 2년 전 놀이터가 철거된 곳에 살던 아이는 동네에 마땅히 놀 데가 없어서 그냥 PC방 가서 논다고 한다. 봉쇄 테이프를 끊기 위해 발의된 법안은 한참을 국회에서 잠자다 겨우 통과됐지만 놀이터의 봉인을 해제하기엔 여전히 미약하다. 골목길은 주차된 차에 빼앗긴 지 오래다. 들로 산으로 놀러 다닌다는 이야기는 자전거 타고 큰 길 건너서 15분쯤 가야 친구 하나 있다는 요즘 농어촌 아이들에게는 꿈같은 소리다.

훗날 ‘응답하라 2015’ 드라마를 만들게 된다면 주 촬영지는 화장실, 교실, PC방이 될지도 모른다. 해같이 빛나는 추억의 장소를 많이 가진 어른이라면 지금 떠올려 보자. 그리고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 어른으로서 직무 유기하는 건 아닌지.

제충만 세이브더칠드런 국내옹호팀장
#응답하라 1988#응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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