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경계 밖에서의 발견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5일 03시 00분


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서른이 넘어서 혼자 유럽 여행을 떠났다. 오롯이 내가 번 돈을 몇 년간 모아 가는 여행이니만큼 준비도 혼자 해보기로 결심했다. 해외 여행을 처음 간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은 여행사가 준비한 패키지 프로그램만 이용해 봤으니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이미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해 코스를 짠 뒤 현지 교통편을 직접 예약했다. 여행 책자를 사고 필요한 정보가 있는 곳에는 책갈피로 표시해 두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도 가입해 필요한 게시물을 찾아 읽고 인쇄했다. 출발 전날까지 체크리스트를 보면서 빠뜨린 것이 없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이토록 열심히 준비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은 휴대전화를 정보 검색 용도로 사용하지 않기로 다짐했기 때문이다. 평소 중독이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휴대전화를 끼고 살았다. 메신저로 온종일 지인들과 연락을 주고받았고 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연예인 소식을 탐독했다.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잠드는 날도 많았다.

검색어만 넣으면 몇 초 만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편리함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소중한 시간을 휴대전화를 보며 허비하기가 싫었다. 휴대전화를 가지고 다니면 다시 못 볼 풍경을 앞에 두고도 휴대전화에 코를 박고 있을 것이 뻔했다. 게다가 내게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다. 길눈이 밝은 편이라 한 번 갔던 길은 잘 잃어버리지 않으니 지도만 있으면 얼마든지 모든 길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 여행에서는 미리 알아보고 준비한 것들이 소용없어지는 순간이 여러 번 닥쳤다. 입국부터가 문제였다. 첫 여행지에 도착했는데 당연히 있어야 할 ‘출입국심사’를 하는 곳이 없었다. 졸지에 밀입국자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었다. 알고 보니 별일도 아니었다. 다른 나라를 거치는 비행기를 탔는데 같은 유럽연합에 속해 있던 경유지에서 출입국심사가 끝난 것이었다. 어쩐지 두 시간 경유하는데 여권을 검사하고 도장을 찍는 것이 이상하다 했다.

싼 맛에 미리 예매해 두었던 현지 열차표가 문제가 된 적도 있다. 현지 회원 우대가로 싸게 풀린 표였는데 외국어로 된 설명을 읽지 않고 덥석 예매한 것이다. 몰라서 그랬다고 짧은 영어로 설명했지만 벌금을 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여행은 즐거웠다. 여행지도와 책자를 몽땅 잃어버려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을 때는 같은 민박집에서 마주친 여행 선배가 도움을 줬다. 다음 여행지로 옮기기 전 자기가 가지고 있던 지도를 내게 넘겨주었고 책자보다 더 꼼꼼하게 여행 코스를 설명해줘서 문제없이 일정을 소화할 수 있었다.

지도에 의존해 길을 찾다 보니 낯선 곳에 걸음이 닿는 일도 흔했다. 처음에는 목적지와 다른 장소에 떨어져 당황했지만 곧 이 시간을 즐기기로 마음을 바꿔 먹었다. 다리가 아플 때는 노상의 카페에 앉아 오랫동안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거리 곳곳에 있는 회전목마를 타며 그냥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길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르는 길을 종일 걸은 날도 있다.

휴대전화가 한시라도 손을 떠나면 못 살 것 같았는데 보름 넘는 기간 휴대전화 없이 살아도 별다른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했지만 종이로 된 지도를 보거나 누군가에게 길을 물으면 신기하게도 원하는 곳에 닿을 수 있었다. 평소 정해진 계획대로 일이 돌아가지 않으면 배가 아플 만큼 스트레스를 받던 내가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밥을 먹고 다른 여행자들의 권유에 일정에 없는 길을 나서기도 했다.

며칠 새 여러 국경을 넘나드는 여행을 경험하며 내가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경계가 조금은 흐릿해짐을 느꼈다. 경계 안에 있던 습관이나 삶의 방식 대신 밖의 것들을 택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도, 불편하지도 않았다. 나를 완전한 한 덩어리라 여겨왔지만 실은 작고 다른 여러 조각으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것을 낯선 곳에 가서야 깨달았다.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도 내 속에는 많은 미지의 세계가 있는 듯하다. 얼마나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좀 더 모험이 필요할 것 같다.

손수지 헬스케어 홍보회사 엔자임헬스 차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