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스케치]서울 거리 플라타너스, 큰 키 때문에 간판 가린 죄로 퇴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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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2015년 한국의 가로수 변천사

가을빛이 살포시 물들기 시작한 14일 서울 중구 정동길 풍경. 은행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어 서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서울시는 현재 29만여 그루인 가로수를 2018년 32만 그루까지 늘릴 계획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가을빛이 살포시 물들기 시작한 14일 서울 중구 정동길 풍경. 은행나무가 줄지어 심어져 있어 서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손꼽힌다. 서울시는 현재 29만여 그루인 가로수를 2018년 32만 그루까지 늘릴 계획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잊을 수 없는 기억에/햇살 가득 눈부신 슬픔 안고/버스 창가에 기대 우네… 이렇게도 아름다운 세상 잊지 않으리/내가 사랑한 얘기/여위어 가는 가로수 그늘 밑 그 향기 더 하는데….’ (이문세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가을색(色)이 물들고 있던 10월 초 어느 날. 서울 중구 정동거리의 한 카페에서 커피향을 타고 이문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애잔한 선율 속 먹먹한 이문세의 목소리가 전하는 그 가로수의 정체가 문득 궁금했다. 그래서 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물었다. 전화기 너머 이문세가 느릿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가로수의 정체는 바로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온 ‘1988년 9월 15일’ 종로구 동숭동 거리에 많이 서 있던 ‘그 나무’ 였다. 》

수양버들, 은행나무 모두 오래가진 못했네

가로수(街路樹)가 우리 역사에 등장한 건 조선시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 1년(1453년) 5월 12일 의정부 대신들이 ‘봄부터 경외의 큰길 좌우에 소나무 잣나무 배나무 밤나무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 나무를 많이 심고 벌목하는 걸 금지하라’고 왕에게 청하는 기록이 나온다. 경기 수원시와 의왕시 사이의 지지대 고갯길에 서 있는 노송들 중 일부는 정조 임금(1752∼1800)이 직접 심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조경학자들에 따르면 가로수가 정책적으로 식재되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부터다. 일제는 경성(京城·당시의 서울)에서 지방으로 뻗어 가는 신작로를 건설하면서 대로변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 이때부터 인기를 끈 나무는 ‘수양버들’이다. 성장속도가 빠르고 다 자라면 잎가지가 길게 드리워 그늘을 만드는 데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옛 산수화에 자주 등장할 정도로 선비들이 좋아하는 나무이다 보니 벚나무와 달리 조선인들의 반감도 피할 수 있었다. 물을 좋아하는 수양버들은 한강 중랑천 안양천 등 주요 하천변을 따라 집중적으로 심어졌다. 1975년 서울 시내에 있던 걸로 집계되는 가로수 6800그루 가운데 36%를 차지할 정도로 과거에는 가장 흔한 가로수였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봄이면 하얀 솜털처럼 서울 하늘을 가득 메우는 수양버들 수나무가 뿌리는 ‘홀씨’ 때문이었다. 유지용 서울시 조경과 주무관은 “흔히 꽃가루로 오해받는 수양버들 홀씨가 시민들의 호흡기 알레르기와 천식을 유발하는 주범으로 지목됐다”고 말했다. 가로수로서는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셈이다. 서서히 베어지기 시작한 수양버들은 지난해 서울 전체 가로수(29만3389그루) 중 31그루만 남을 정도로 가로수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수양버들의 빈자리는 ‘양버즘나무’가 메웠다. 플라타너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나무는 공해가 점차 심해지던 1980년대 서울에 가장 적합한 나무였다. 세계 4대 가로수(피나무 느릅나무 마로니에 양버즘나무)에 들 정도로 세계적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연간 6.9kg이 넘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할 정도로 공기정화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대기오염이 심한 곳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 해외 순방에 나선 중앙정부와 서울시 관료들이 대거 수입을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봉호 서울시립대 조경학과 교수는 “양버즘나무를 한창 심은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이만한 가로수는 없다’는 인식이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확고했다”며 “가을이면 거리에 가득 떨어지는 양버즘나무 잎사귀를 보고 서구의 낭만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양버즘나무의 영광도 채 20년을 가지 못했다. 1년에 2m씩 자라는 빠른 성장속도가 오히려 이 나무의 성장세에 걸림돌이 됐다. 웬만한 4, 5층 상가 건물 높이만큼 자란 양버즘나무는 “햇볕이 들지 않는다” “간판을 가려 장사가 안 된다”는 등 시민들의 가로수 교체 민원을 촉발시켰다. 1∼3년 주기로 가지치기를 할 때마다 ‘까까머리’처럼 흉물스럽다는 말을 들은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결국 서울시는 1990년대를 기점으로 가로수종 다변화에 나서기 시작했다. 양버즘나무를 더 이상 심지 않고 거리 정비를 통해 기존에는 심지 않던 나무 종을 대거 육종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은행나무)이나 은평구 불광동의 회화나무길 등 특색 있는 가로수 거리가 바로 이 시기부터 조성됐다.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 가득한 소나무 가로수는 한때 ‘소나무 마케팅’에 주력한 서울 중구의 기획 작품이다. 2008년 이전만 해도 이곳에는 은행나무, 양버즘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서울 중구 을지로 일대에 가득한 소나무 가로수는 한때 ‘소나무 마케팅’에 주력한 서울 중구의 기획 작품이다. 2008년 이전만 해도 이곳에는 은행나무, 양버즘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바야흐로 가로수 ‘춘추전국시대’

1970년대에 비해 35배 넘게 늘어난 1990년대 가로수계의 황태자는 ‘은행나무’다. 지금이야 코를 쥐게 하는 열매 냄새로 가을만 되면 모진 소리를 듣는 신세가 됐지만 서울시가 가장 열심히 가꿔온 가로수다. 1971년 4월 3일 서울시가 수도 서울을 상징하는 시목(市木)으로 선정한 나무가 은행나무이기 때문이다. 30m가 넘는 거목으로 자라나는 은행나무는 서울의 무한한 성장을 상징하기도 한다.

유 주무관은 “사람들의 오해와 달리 은행나무는 정말 장점이 많은 나무”라고 강조했다. 그가 손꼽은 여러 장점 중 하나는 ‘단풍’이다. 서울을 방문하는 많은 중국인 관광객이 “서울에서 노란빛 은행 단풍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한다고 한다. 게다가 은행나무는 약을 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병해충에 강하다. 유 주무관은 “예부터 은행나무가 많은 숲에는 모기가 살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며 “게다가 아황산가스 등 오염물질을 흡수하는 능력 역시 탁월하다”고 했다. 이 덕분에 은행나무는 세종대로를 비롯해 종로 용산 등 서울 도심부터 외곽지역까지 두루 심어져 최근(2014년) 11만4060그루(39%)로 전체 가로수 가운데 가장 많다.

하지만 열매 냄새는 여전히 해결이 되지 않는 난제다. 흡사 ‘똥냄새’를 방불케 하는 악취로 서울시는 올해만 400여 명의 인력을 동원해 열매제거반을 운영하고 있다. 게다가 2010년 이후 지속되는 가뭄과 무더위로 늘어난 ‘황화현상(엽록소 부족으로 잎이 누렇거나 붉게 변하는 현상)’이 잦다는 점도 은행나무의 단점으로 꼽힌다.

은행나무의 인기가 수그러들자 서울 가로수종은 ‘춘추전국시대’로 변했다. 한때 은행나무 대체재로 가장 주목받던 건 ‘소나무’다. 중구가 소나무 보급에 가장 앞장섰다. 2008년부터 중구는 자매도시인 강원 속초시가 보내온 토종 적송(赤松) 2000여 그루를 명동과 을지로 퇴계로 남산 일대에 잔뜩 심었다. 애국가 2절에 ‘남산 위에 저 소나무’라는 가사가 나올 만큼 역사적 상징성이 크고 사시사철 푸른색이 보기 좋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소나무는 최근 남산까지 확산된 재선충 문제와 비싸고 관리가 어렵다는 단점 때문에 2011년 이후부터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5∼6월에 피는 꽃의 모양과 색이 쌀과 비슷한 이팝나무는 최근 가장 각광받는 가로수다. 2006년 이전만 해도 서울 길가에서 볼 수 없던 이 나무는 현재 1만1000여 그루가 거리에 심어져 있다. 동아일보DB
5∼6월에 피는 꽃의 모양과 색이 쌀과 비슷한 이팝나무는 최근 가장 각광받는 가로수다. 2006년 이전만 해도 서울 길가에서 볼 수 없던 이 나무는 현재 1만1000여 그루가 거리에 심어져 있다. 동아일보DB
그 대신 벚나무 이팝나무 느티나무가 요즘 핫(hot)한 가로수로 떠오르고 있다. 무엇보다 이 나무들은 꽃이나 잎 모양새가 아름다운 게 특징. 희고 긴 꽃잎이 밥풀(이밥)을 닮았다고 이름 붙여진 이팝나무가 가장 많이 우거진 장소는 2005년 새로 조성된 청계천변이다. 한 교수는 “이팝나무는 흙이 두툼하지 않은 장소에서도 잘 자랄 만큼 생명력이 강하고 모양새가 좋다. 향후 가로수의 ‘대세’가 될 조건을 두루 겸비한 나무”라고 평가했다. 일본산(産)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진 벚나무 역시 꾸준히 늘고 있다. 1998년 4355그루에 불과했지만 지난해까지 2만8543그루로 6배 넘게 늘었다.

한 교수는 “대규모 숲 조성이 불가능한 대도시에서 가로수 심기는 부족한 녹지공간을 확충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각 장소의 특성에 맞는 여러 가지 가로수를 심고 가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가지 수종의 비율이 최대 ‘15%’를 넘지 않는 일본 도쿄(東京)처럼 수종 다변화를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단순히 심기만 하고 방치하기보다 각종 관목(키 작은 나무)이나 잔디로 주변을 채운 ‘가로숲’으로 가꿔야 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한 교수는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가로수를 단순히 한 줄만 심는 것보다 두 줄로 심으면 주변 온도가 2도 넘게 떨어졌다”며 “온실효과 등 환경 문제를 해소하는 데도 가로수 심기가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가수 이문세가 노래하는 가로수가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1980년대 그 시기와 딱 맞아떨어지는 나무. 그는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라고 말했다. “저와 영훈 씨(2008년 작고한 작곡가 이영훈)가 자라고 노래하던 동숭동 일대에는 플라타너스가 가득했어요. 가로수는 음악의 소재가 되고 다른 여러 면에서도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정말 고마운 존재인 것 같아요”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철호 기자 irontiger@donga.com
#가로수#플라타너스#이팝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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