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인 듯 조폭 아닌… ‘동네 건달’ 천태만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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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오셨습니까” 10여명 거느리고 행패… 알고보니 수산물업체 직원들
경찰 특별단속 “적극 신고를”

서울 강남구 영동시장 상인들에게 오모 씨(61)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술에 취한 오 씨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나면 상인들은 그와 눈길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오 씨의 별명은 ‘왕건이’. 자신을 “조선의 왕인 왕건이다”라고 소개하며 시장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그가 왜 고려 태조인 왕건을 조선시대 왕으로 착각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는 호프집 등 음식점에 무작위로 들어가 행패를 부리면서 ‘왕’과 같은 대우를 요구했다. 공짜 술과 음식을 요구하며 욕설을 퍼붓는 오 씨에게 피해를 본 업소만 7곳에 이른다. 행여 상인이 경찰에 신고를 하면 다음 날 업소를 다시 찾아와 “내가 오늘 너를 죽이고 형무소 간다”며 협박했기 때문에 상인들은 좀처럼 경찰에 신고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1년 넘게 이어져 온 오 씨의 범죄 행각은 동네 조폭 특별단속을 벌이고 있는 경찰에 붙잡히면서 끝났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오 씨를 지난달 20일 영동시장 내 A호프집에서 행패를 부린 혐의(업무방해)로 체포했다고 4일 밝혔다. 오 씨를 경찰에 신고한 호프집 주인 김모 씨(46·여)는 “경찰이 오 씨처럼 서민의 피를 빨아먹는 상습 범죄자를 검거한다는 소식을 듣고 용기를 내 신고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9월 3일부터 ‘동네 조폭’ 특별단속을 벌이고 있다. 동네 조폭은 일정 지역을 기반으로 상습 범죄행위를 저지르는 개인이나 소규모 폭력배를 뜻한다. 경찰 관계자는 “동네 조폭은 경찰의 지속 관리를 받는 조직폭력배와 달리 주류에 포함되지 못한 ‘넘버3’(삼류 깡패)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동네 조폭의 유형은 오 씨 같은 ‘진상 손님’과 ‘허세 및 세력 과시 집단’ ‘상습공갈범’으로 분류된다. 9월 강남경찰서가 검거한 조모 씨(36) 일당은 전국구 조직폭력배로 위장한 뒤 강남구의 B유흥주점에 출입해 종업원을 폭행했다. 한 여성 종업원이 자신들이 준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10여 명씩 무리를 지어 다닌 이들은 “형님! 오셨습니까?”라며 90도 각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하거나 웃옷을 벗어 문신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조직폭력배 행세를 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수산물 도소매업체 직원들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조 씨 일당 같은 부류는 자신들의 세력을 허위로 부풀려 피해자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한다. 피해자 입장에선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보복이 두려워 신고조차 못한다”고 말했다.

불법 유흥업소가 선뜻 피해 신고를 못한다는 점을 악용한 동네 조폭도 있다. 김모 씨(34)는 5월 온라인 구직 사이트를 통해 강남권 일대 안마시술소의 상호명과 업무용 휴대전화번호를 확보했다. 이후 그는 “C안마시술소 종업원 중 마약 투약자가 있다”며 경찰에 허위 신고를 했다. 그러고는 안마시술소 업무용 휴대전화에 “내가 신고를 한 사람인데 10만 원을 보내지 않으면 이번에는 성매매를 하고 있다고 신고해 문을 닫게 만들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경찰에 섣불리 신고를 했다가 불법행위가 들통날 것을 우려한 업주는 결국 김 씨에게 돈을 송금했다. 김 씨는 이런 수법으로 45회에 걸쳐 11개 안마시술소로부터 296만 원을 받아 챙겼다. 동네 조폭 탐문 중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계좌추적을 해 지난달 14일 김 씨를 검거했다. 이건화 강남경찰서 형사과장은 “특별단속 기간에는 신고자의 경미한 범법행위에 대해 형사처벌 및 행정처분을 감면한다. 동네 조폭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피해 업주들의 적극적인 신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윤철 기자 trigger@donga.com
#조폭#동네 건달#수산물업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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