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의 한 초등학교 3학년인 김모 군(9)은 다가올 여름방학만 생각하면 머리가 아프다. 방학날인 25일이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는데 방학 계획표가 이미 촘촘하게 짜여 있기 때문. 오전 9시 공부방 수업을 시작으로, 점심식사 뒤에는 영어 학원→수학 학원→태권도장→바둑 학원을 돌아야 하루가 끝난다. 토요일은 그나마 통기타 연주 학원 한 곳만 다녀오면 돼 쉴 틈이 있다. 김 군은 “학원 시간표를 짜는 내내 엄마는 나한테 한 번도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았다”며 “지난 겨울방학 때는 5곳을 다녔는데 이번에는 2곳이 늘어나서 7곳이 됐다”고 말했다.
○ 방학이 더 괴로운 아이들
서울 지역 초중고교가 다음 주부터 일제히 여름방학에 들어간다. 초등학교는 25일 대부분 방학식이 열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대부분 22, 23일 방학을 한다. 방학(放學)이란 말은 그대로 풀면 ‘학업을 잠시 놓는다’는 뜻. 학기 중에 지친 몸과 마음을 쉬면서 재충전하는 기간이지만 이는 옛말이 된 지 오래다.
학원이나 캠프를 전전하는 방학은 김 군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 동대문구 경희초등학교에서 만난 6학년 정모 군(12)은 이번 방학 때 한 대학에서 열리는 영어캠프에 다닐 예정이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캠프에서 영어 수업을 듣고 끝나는 시간에 맞춰 어머니가 데리러 오기로 했다. 하지만 집이 아니라 학원으로 가야 한다. 날이 캄캄해지는 오후 9시가 돼서야 학원은 끝난다. 정 군은 “엄마가 방학이라고 늦잠 자면 늘어진다고 미리 영어캠프를 등록했다”고 말했다.
엄마들은 자녀의 이런 고충을 알지만 “남들이 다 하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초등학교 2학년 딸을 둔 홍현숙 씨(31)는 “엄마들 사이에서 방학이란 노는 시간이 아니라 집중학습을 시켜야 하는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말했다. 홍 씨는 학기 중에는 미술, 영어만 시켰지만 방학이 되면 수학 선행반도 등록할 예정이다.
초등학교 1학년인 외손자를 데리러 온 박순자 씨(55·여)는 “딸이 자식이 1명이라 그런지 자식 교육에 욕심이 너무 많다”며 “학기 중에도 5과목을 가르치는데 방학하면 미술 과외도 시킨다더라”며 혀를 찼다.
○ ‘강좌 선점’ 경쟁까지 하는 엄마들
엄마들 사이에서는 수강료가 저렴하고 프로그램은 알찬 강좌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특히 학원보다 대학이나 공공기관에서 열리는 방학 프로그램은 접수 시작 날 컴퓨터 서버가 마비될 정도로 몰린다.
서울 서대문구 자연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여름방학 박물관 교실’은 14일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 총 2720명을 모집했는데 모두 마감됐다. 박물관 측은 “그래도 수강을 원하는 신청자가 계속 몰려 대기자로 일단 접수를 받고 있다”며 “매년 여름 접수 때마다 서버가 멈추기 일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방학 중 집중학습을 시키려는 부모의 욕심이 아이들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선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아이들은 방학을 맞으면 쉬고 놀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되는데 이를 부모가 무시하고 과잉학습을 시키면 아이들 마음속에 불만이 생긴다”며 “아이의 자율적 의사와 동기를 무시한 학습이 스트레스로 이어지면 심한 경우 우울증 증세를 보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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