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열 28일 전남 장성군 효실천사랑나눔요양병원 화재로 가족을 잃은 유족이 화재 현장을 바라보다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장성=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영안실에 누워있는 형의 코와 입은 그을음으로 가득차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팔순 노모에겐 형이 숨졌다는 사실조차 알리지 못했다. 노모는 사고 바로 전날인 27일까지도 형의 병실 바로 옆 병실에 머물고 있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지척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을까 봐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 3009, 3010호 엇갈린 모자(母子)의 운명
서울 동작구에 사는 장모 씨(45)는 28일 오전 전남 장성군 요양병원 화재 참사로 큰형(53)을 잃었다. 둘째 형이 해병대 복무 중 사고로 숨진 이후 하나 남은 형이었다.
장 씨의 형은 지난해 뇌출혈로 수술을 받은 이후 사고가 난 요양병원 3010호실에 1년가량 머물렀다. 올해 2월경 이번엔 어머니 김모 씨(83)가 치매 증세를 보여 병원에 모셔야 했다. 팔순 노모는 한사코 “큰아들이 있는 병원이 아니면 안 가겠다”고 우겼다. 결국 어머니는 바로 옆 3009호실에 입원했다.
노부모는 고향인 경북 구미에서도 금실이 좋고 아들딸 아끼기로 소문난 부부였다. 장 씨의 아버지는 어머니가 입원하자 병실에 함께 머물렀다. 수술 후유증 때문인지 때로 거친 행동을 하는 큰아들을 달래기 위해 아버지는 매점에서 얻어온 빵이며 과자를 쌓아두고 있었다. 장 씨는 “아버지는 ‘하나씩 주면 형이 좋아한다’며 유통기한이 지날 정도로 먹을 걸 모아두셨다”고 기억했다.
화재 참사 전날 모자(母子)의 운명은 엇갈렸다. 장 씨는 어머니를 담당하던 별관 관계자와 치료 조치 문제로 말다툼을 한 끝에 어머니를 별관과 분리된 본관 202호 병실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이날 밤 장 씨의 설명을 들은 어머니는 큰아들에게 “그럼 오늘은 나 저기(202호)에서 잘 테니까, 너는 여기서 자렴”이라고 했다. 그게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알지 못했다.
장 씨는 “사고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이 병원에 연락해 부모님을 다른 병원으로 모시는 것이었다”며 “혹여 충격을 받으실까 봐 병실 TV도 모두 꺼달라고 했지만 어떻게 아셨는지 어머니가 ‘내 아들 타 죽는 것 같다. 아들한테서 전화 안 오니’라며 기다리신다고 한다”며 울먹였다.
○ 화염 속에서 마지막 모시지 못해 죄스러워
수많은 젊은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또다시 어이없는 화재 참사로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사연이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어른의 마지막을 모시지 못한 자식들은 통한의 눈물만 흘렸다. 부모의 고향과 가까워 병원에 입원시켜 드렸고 증세가 심해져 별관으로 옮겼다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수년 전부터 뇌중풍(뇌졸중)으로 입원 중이었던 희생자 박모 씨(77)의 딸은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고집을 부려 광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가 여기로 옮긴 지 이틀 만이었다. 안 그래도 더운 것 싫어하시는 양반이 그 뜨거운 곳에서 얼마나 괴로우셨겠나”라며 눈물을 흘렸다. 4, 5년 전 치매 진단을 받은 아버지를 입원시켰다는 홍모 씨(42·여)는 “아버지는 농사를 지어 2남 2녀를 기르셨는데 딸을 예뻐해 항상 자전거에 태우고 다니셨던 기억이 있다. 한평생 어렵게 사신 분이 가는 길까지 이러니 원통하다”고 말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몸이 불편한 동생을 돌봐온 형제의 사연도 있었다. 임모 씨(67) 부부는 뇌성마비를 앓는 동생과 부모를 40년간 돌봤다고 했다. 10여 년 전 부모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동생을 도맡아 62세가 되도록 챙겨왔다고 했다. 부부는 올해 1월 동생이 거동을 하지 못해 방바닥에 누운 채 화상을 입는 등 증세가 악화되자 입원을 결정했다. 부부는 “약이 떨어졌다고 해서 갖다 주려고 약도 받아 왔는데…. 우리랑 살았으면 힘들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날 유가족들은 요양병원 바깥에 설치된 임시 천막 아래 머무르며 사고 원인 및 병원 대응 규명, 합동분향소 마련 등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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