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사건 터지면 달려가는 ‘유족 지원 시민모임’ 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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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피해 공동추모위’ 출범

#1. 2011년 6월 2일 발생한 ‘구의동 묻지 마 살인사건’의 피해자 유가족 류원석(가명·43) 씨는 가해자 이모 씨(58)의 재판 과정을 지켜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류 씨의 여동생(당시 33세)은 퇴근길에 이 씨가 휘두른 흉기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여동생은 이 씨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고 단지 ‘집을 나간 아내와 뒷모습이 닮았다’는 게 이유였다.

류 씨는 재판 과정에서 이 씨를 엄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법률 지식이 부족했다. 그는 비슷한 ‘묻지 마 살인’의 판례를 찾고 법무부 산하 사단법인 피해자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1심 재판을 앞두고 탄원서를 3차례 제출했다. 이 씨는 2012년 1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이 확정돼 수감 중이다. 류 씨는 “동생의 죽음 이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며 “나는 운이 좋았지만 대부분 유가족은 이런 도움 없이 혼자 싸워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2. 2011년 7월 4일 이후 박근희 씨(59·개인택시 운전사)의 삶은 ‘악몽’으로 변했다. 이날 군복무 중이던 아들 치현 씨(당시 21세·상병)를 비롯해 4명이 인천 강화군 해병 2사단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의 충격으로 박 씨는 우울증이 악화돼 1년가량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술로 날을 지새우고 일을 나가도 차를 세워두고 멍하니 있곤 했다. 아내(54)와 딸(28)을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겨우 버틴 시간이었다. 박 씨를 가장 괴롭힌 건 사랑하는 아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는 자신이 처음 해병대에 가면 어떠냐고 아들에게 권하지만 않았어도 아들이 살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는 “살인 피해 유가족들은 본인이 피해자인데도 혼자 괴로움을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류 씨와 박 씨처럼 살인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을 위한 공동추모위원회가 국내 처음으로 출범한다. 한국피해자지원협회는 살인 피해 유가족 및 살인미수사건 피해자의 치유와 회복을 돕기 위해 ‘한국살인피해추모위원회’를 설립한다고 9일 밝혔다. 서울 부산 대전 등 전국 17개 지역에 위원회를 두고 피해 유가족을 지원할 방침이다. 추모위에는 교수 변호사 의사 등 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해 심리치료, 법률지원, 생활상담 등을 해준다. 해당 지역 내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지역 추모위가 나서서 지원팀을 꾸려 지원한다. 피해 유가족도 직접 추모위원으로 참여해 비슷한 고통을 당한 이들을 도울 계획이다.

‘한국살인피해자추모관’ 온라인 사이트도 개설한다. 사이트에는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개인관과 합동관, 타살혐의사건이나 장기미제사건 등을 알리는 특별관이 마련된다. 살인죄 양형기준을 강화하는 등 법개정을 위한 서명운동과 유가족 지원을 위한 모금 코너도 마련한다. 협회는 3월 15일 추모위 출범 및 추모관 개관을 알리는 공식 기자회견을 연다.

추모위에는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송진현 전 서울행정법원장, 오한진 관동대 의대 교수 등 전문가와 일반 자원봉사자 68명이 참여했다. 추모위는 15일 유가족들과 간담회를 열어 구체적인 활동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추모위에 참여한 유가족 박 씨는 “살인사건의 피해자인 유가족으로선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가 필요한데 이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먼저 고통을 겪은 만큼 이들이 더 빨리 정상으로 돌아오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공정식 한국범죄심리센터장은 “정부에서 피해 유가족 회복을 위한 심리치료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미미한 수준이다. 1인당 2500만 원에 이르는 범죄자 교화비용에 비하면 피해자들에 대한 금전적 지원 역시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며 “유가족들이 적극적으로 주장을 펼 수 있는 공론의 장을 마련해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는 살인 등 강력 범죄로 숨진 피해자를 추모하고 유가족을 돕는 공동체가 일반화돼 있다. 1994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설립된 비영리단체 ‘살인에 반대하는 시민모임’(Citizens Against Homicide)이 대표적이다. 살인으로 가족을 잃은 제인 알렉산더와 얀 밀러 씨가 공동 설립한 이 단체는 현재 미국 전역에서 활동 중이다.

주애진 기자 jaj@donga.com
#살인사건#유족 지원 시민모임#살인피해 공동추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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