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기]“땀흘리는 노년을 살겠다던 汗翁의 열정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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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1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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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큰 어른 故 신태범 선생 탄생 100주년 추모식

인천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신태범선생(1912∼2001)
인천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신태범선생(1912∼2001)
“80세가 되신 어느 날 ‘한옹(汗翁·땀 흘리는 노인)’으로 불러 달라고 하시더군요. 나이가 드셨지만, 남은 인생을 땀 흘리며 보내시겠다는 열정과 내공에 지금도 고개 숙여집니다.”

인천의 큰 어른으로 통하던 고(故) 신태범 선생(1912∼2001)이 태어난 지 100주년을 맞아 그의 영향을 받은 인천지역 각계 인사들이 6일 인천 중구 항동 파라다이스 오림포스호텔에서 추모 모임을 열었다. 1940∼2000년대 언론 등에 기고한 신 선생의 글을 모은 유고집 ‘한옹 신태범 박사의 인천 사랑’의 출판 기념회를 겸한 자리였다. ‘한옹 탄생 100주년 추모 모임 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이날 모임에는 송영길 인천시장과 원혜영, 문병호 의원 등 정치인을 비롯해 지용택 새얼문화재단 이사장, 이기인 대한노인회 인천연합회장, 이귀례 대한차문화협회 이사장, 유훈 인천향우회장 등 각계 인사 120명가량이 참석했다.

서울대 전신인 경성제국대 의학부 박사학위까지 받은 신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신 박사’로 불렸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창씨개명을 거부한 채 1942년 인천 옛 도심권인 중앙동에 ‘신 외과병원’을 개원한 뒤 명의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평범한 의사를 거부한 채 혼란기인 광복 직후 구국활동에도 나섰다. 1945년 8월 ‘인천치안위원회’ 조직을 주도하다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발을 내딛게 된다. 그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죽산 조봉암 선생과도 친하게 지냈고, 결국 그의 권유에 의해 당시 좌파 계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 인천시위원회’ 부의장을 맡기도 했다. 미군정청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던 신 박사가 좌우 이념과 상관없이 지역사랑의 일환이었지만, 결국 ‘빨갱이’라는 지탄을 받자 1개월 만에 부의장직을 그만뒀다.

183cm, 90kg의 큰 체격이었던 신 선생은 대학생 때 일본 도쿄의 빙상대회에 참가한 아이스하키 선수였고 유도, 검도 유단자였을 정도로 스포츠광이었다. 또 문예지를 창간하는가 하면 외교, 역사, 지리에도 해박했다.

그의 외과병원 2층은 ‘인천 사랑방’ 구실을 했다. 대학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수시로 이곳을 드나들면서 대담을 나누는 장소였다. 신 박사가 강연을 하고, 진로 상담도 해줘 따르던 후배가 많았다. 신 박사는 6·25전쟁 이후 인천체육회장, 인천시교육위원, 인천시의사회 회장을 지내다 1958년 제4대 총선에서 자유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차점 낙선했다.

이후 인천시 행정자문에 응하면서 집필활동도 왕성하게 벌였다. 수필집 ‘반사경’, 인천 향토사인 ‘인천 한세기’와 ‘개항 후의 인천 풍경’, 식문화를 소개한 ‘먹는 재미, 사는 재미’ 등을 출간했다.

새얼문화재단 지 이사장은 “각 방면에 지식과 교양을 많이 갖춘 신 선생으로부터 신 지식을 얻기 위해 병원 2층 ‘사랑방’을 자주 찾았다”며 “보석과 같은 이야기를 더 많이 듣지 못해 안타깝다”고 회상했다. 조우성 인천일보 주필은 “따듯한 인간미와 유려한 필체가 돋보이는 책을 많이 저술했다”고 칭송했다.

신 박사의 부친은 구한말 국내 최초의 현대식 군함인 광제호 부함장을 지낸 신순성 제독이었으며, 둘째 아들 용석 씨는 인천아시아경기대회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이다.

박희제 기자 min07@donga.com
#한옹#신태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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