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범 잡았다고 글올린 고교생, 사실은… 온라인 거짓말 즐기는 10 대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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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돈암동 강간미수범 잡았어요’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식당에서 여주인을 성폭행하려던 남성을 쫓아갔다고 작성자인 A 군(17)은 설명했다.

검거 당시 상황도 자세하게 적었다. 성폭행범의 가방끈을 자기가 잡아 넘어뜨렸고 직접 신고했다고 자랑했다. 붙잡고 난 뒤 찍었다며 범인의 뒷모습 사진까지 올렸다. 누리꾼들은 지난달 28일 올라온 글을 보고 ‘참 멋있는 고등학생’이라며 칭찬했다. 일부 언론은 기사화했다. 그런데….

○ 실제 뉴스처럼 그럴듯하게 조작

독자의 제보를 받고 동아일보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대부분 거짓이었다. 경찰 관계자와 피해자의 아들 B 씨는 “당시 성폭행 미수 사건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A 군은 검거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범인은 B 씨가 붙잡았다. A 군은 근처에서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B 씨는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경찰이 오기 전까지 범인을 붙잡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야속하고 안타까웠죠. 나중에 A 군의 글을 보고는 할 말이 없더군요. 철없는 고교생의 영웅심리라고 생각하더라도 사람 두 번 죽이는 듯해서 화가 납니다.”

A 군의 글은 10대들의 온라인 거짓말이 점점 교묘해지고 있는 추세를 보여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거짓말은 ‘소설’ 수준이었지만 최근에는 구체적 내용을 담은 ‘뉴스’처럼 보일 정도. 거짓말이 다양하고 대담하고 정교해졌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전에는 ‘지구 멸망설’이나 ‘태양 폭발설’ 등 소설 같은 제목의 글이 많았다. 요즘은 실제 벌어진 일을 소재로 그럴듯하게 부풀리는 식이다. 태풍이 발생해 한반도로 다가오자 “제주도에서 조랑말이 날아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지난해부터 전남 순천, 경남 창원, 제주 서귀포에서 떠돌던 인신매매 괴담도 마찬가지다. 경찰에 붙잡힌 괴담 작성자는 대부분 10대 여학생이었다. 최근에는 손연재(리듬체조) 기성용(축구) 등 스포츠 스타를 사칭한 글이 페이스북에 이어졌다. 이 글들 또한 작성자의 상당수가 10대였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최근 5, 6년 사이 온라인에 뉴스 같은 거짓말이 부쩍 늘었다.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라 진짜 어린 학생들이 썼는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고 말할 정도.

○ 10대 대부분이 온라인 거짓말 경험

동아일보가 서울 강동구 A고교의 학생 80명에게 물은 결과는 놀라웠다. 온라인에서 거짓으로 뉴스 같은 글을 작성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74명(92.5%)이 ‘그렇다’고 답했다. 그중 12명은 ‘10회 이상’ 상습적으로 글을 남겼다고 했다. 죄책감을 느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절반이 넘는 42명이 ‘전혀 없다’고 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이 지난해 11월 3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윤리문화실태조사에서도 10대의 73.8%가 허위 사실, 미확인 정보를 퍼뜨린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온라인 거짓말이 교묘해진 데는 스마트폰의 보급이 큰 영향을 미쳤다. 뉴스 접근성이 좋아지고 유포 방법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신용태 한국인터넷윤리학회 부회장(숭실대 컴퓨터학과 교수)은 “10대들은 이제 학원을 오가면서까지 뉴스 헤드라인을 접한다. 글의 소재는 물론이고 쓰는 방식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온라인에서 관심받기를 즐기는 10대의 특성도 이런 거짓말을 부추긴다. 지난해 순천 인신매매 거짓말을 유포시킨 여중생도 경찰에서 “끔찍한 글을 사실인 양 올렸을 때 호기심을 느낀 누리꾼들의 조회수가 폭증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지금 10대는 소통이 안 되는 외로운 세대다. 관심에 대한 집착이 더 자극적인 콘텐츠 양산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10대#온라인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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