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진 셰르파를 위해… ‘히말라야 16년전 약속’ 후배들이 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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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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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高大산악회, 1995년 등정때 사망 셰르파 유족 돕기나서

1995년 네팔 카트만두를 떠나기 전 김종호 대장의 무사귀국을 기원하기 위해 찾아온 장부 셰르파의 부인과 아들 펨바. 오른쪽은 내년 1월 펨바를 다시 만나러 히말라야로 가기 위해 지난달 5일 북한산에서 등반훈련을 마친 오은선 고문(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고대산악회 회원들. 고대산악회 제공
1995년 네팔 카트만두를 떠나기 전 김종호 대장의 무사귀국을 기원하기 위해 찾아온 장부 셰르파의 부인과 아들 펨바. 오른쪽은 내년 1월 펨바를 다시 만나러 히말라야로 가기 위해 지난달 5일 북한산에서 등반훈련을 마친 오은선 고문(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과 고대산악회 회원들. 고대산악회 제공
‘눈물을 글썽이며 우리 대원들의 목에 가다(안전을 기원하는 흰 천)를 걸어주는 미망인의 모습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커다란 두 눈만 껌벅이고 있는 그녀의 15개월 된 아들 펨바에게 남은 네팔 돈을 모두 쥐여주고 나도 눈물을 숨기려 먼 산을 바라보았다.’

1995년 히말라야 산맥의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서 불의의 사고로 현지 셰르파를 잃은 고려대 산악회 등반대장 김종호 씨(56·토목공학과 73학번)가 귀국 후 쓴 수기 중 일부다.

김 씨를 포함한 고대산악회 원정대원 8명은 개교 90주년을 기념해 1995년 8월부터 10월까지 63일간 에베레스트를 올랐다. 장부 셰르파를 비롯해 현지에서 고용한 젊고 유능한 셰르파 6명이 원정대와 함께했다. 생사를 넘나드는 험난한 고산 등반을 시작한 지 2개월 만인 10월 14일 오후 2시 마침내 조용일 대원(43·건축공학 88학번)과 장부 셰르파가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축제의 분위기도 잠시. 불과 한 시간여 만인 오후 3시 30분 베이스캠프에서 망원경으로 두 사람의 하산길을 지켜보던 대원들의 입에서 잇따라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한 사람이 3000m가 넘는 북쪽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었던 것. 15개월 된 아들 ‘펨바’와 20대 초반의 젊은 부인을 남긴 장부 셰르파였다.

워낙 위험한 지대라 원정대는 장부 셰르파의 시신도 찾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하산해야 했다.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는 기쁨보다도 미안함만 가득 안은 채 귀국길에 오른 원정대원들에게 장부 셰르파의 부인은 말없이 흰 천을 목에 걸어줬다. 네팔에서는 길 떠나는 사람에게 안전을 기원하는 뜻에서 흰 천을 목에 걸어주는 풍습이 있다. 당시 부인의 품에 안겨 있던 큰 눈망울의 아이를 바라보며 김 씨는 “너를 생각해서라도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귀국 후에도 펨바의 눈망울을 쉽사리 잊지 못했던 김 씨는 이후로도 2, 3년 동안 꼬박꼬박 옷가지와 돈을 보냈다. 하지만 현지 통신사정이 여의치 않은 데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과의 연락도 자연스럽게 끊겼다.

김 씨와 원정대원들은 마음 한구석에 빚처럼 남아 있던 약속을 17년 만인 2012년 1월 마침내 지킬 수 있게 됐다. 이전부터 선배들로부터 펨바 이야기를 전해 들어왔던 고대산악회 재학생 후배들이 새해를 맞아 히말라야를 다시 찾아가자고 제안한 것. 재학생들은 대부분 해외 원정 등반 경험이 없는 새내기 ‘산사람’이지만 의지와 열정만은 대단했다.

이들은 1995년 장부 셰르파를 소개해준 현지 대행사의 도움을 받아 한 달 넘게 수소문한 끝에 펨바의 연락처와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다. 18세의 청년이 된 펨바는 카트만두에서 작은 식당을 하는 어머니와 떨어져 산골에서 홀로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펨바의 소식을 전해 들은 선배들은 원정비용과 펨바를 위한 장학금을 십시일반으로 걷었다.

이번 등반에는 김 씨 외에 박용일 대장(42·생물학 88학번)과 재학생 8명이 참여한다. 고려대 대학원 체육학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오은선 대장도 이들을 지도하기 위해 합류했다. 이들 원정대는 2012년 1월 2일 출국해 카트만두에서 펨바를 만난 뒤 임자체(6189m) 등반에 나설 계획이다.

원정대는 등반을 준비하기 위해 올해 초부터 주말마다 북한산 등 인근 산을 찾아 훈련을 했다. 부대장을 맡은 천성인 씨(24·식품공학 4년)는 “1학년 새내기들부터 4학년 졸업반까지 모두 한마음으로 히말라야 등반을 준비했다”며 “고산지대에 적응하기 위해 기초 체력을 강화했고 눈 위에서 걷는 연습을 하려고 얼음이 언 계곡에서 등반 훈련을 하기도 했다”고 했다.

출국을 앞둔 김 씨는 “펨바가 벌써 열여덟 살이 됐다는 생각을 하니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실감이 났다”며 “어서 찾아가 늘 밝고 잘 웃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고 작지만 금전적 도움도 주고 싶다”고 했다.

펨바를 위한 장학금은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다. 김 씨는 “펨바가 공부에 뜻이 있다면 한국으로, 가능하면 고려대로 유학을 올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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