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나의 NIE]이주향 수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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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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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살아있는 ‘논리 교과서’

철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상대주의의 매력을 안다. 그렇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궁극의 진리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있는 것도 부정할 수가 없다. 그 그리움은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절에서도, 그 어떤 세미나장에서도 해소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그리움으로 인해 나는 살짝, 고독의 매혹을 배웠다.

신문은 궁극의 진리와도 관계가 없고 상대주의와도 별 관계가 없는 듯하다. 때로는 시각이란 이름의 독선과 편견이 날을 세우고 있고, 때로는 편집을 통한 당당한 왜곡이 부담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나는 그렇지 않겠는가. 그것은 언어를 먹고 사는 이들의 함정이고 한계이기도 하다.

나는 살아있는 논리를 배우고 싶다는 청소년에게 신문을 읽으라고 권한다. 신문에는 시대정신도 있고, 시대가 앓는 문제도 있다. 인터넷만 본다는 청소년도 많다. 인터넷은 읽는 게 아니라 훑는 것이고, TV는 생각하는 게 아니라 보는 것이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보도록 하는 것이다! 신문은 인터넷보다 훨씬 정제되어 있고, TV보다 훨씬 개념적이다.

‘전국 900만의 아이들에게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는 대학 지향적 학교가, 세상일에 관심을 끄고 공부만 하라는 이기적인 부모가 당신의 삶의 중심이라면 더더욱 신문을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우리는 공동체의 문제를 보고, 알고, 느끼고, 평가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므로.

‘나’와 다른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입장이 다른 두 개 이상의 종이신문을 읽으라고 한다. 시각에 따라 신문과 신문의 정의(正義)는 크게 부딪친다. 그것들이 어떻게 부딪치는지를 생각하다 보면, 상대주의의 힘을 배우면서 머리가 커지고 차가워질 것이다.

톱으로 올린 기사, 크게 다룬 기사, 작게 다룬 기사, 오피니언이란 이름의 다양한 주장 속에서 신문이 평가하는 것과 평가절하하는 것, 기억하려 하는 것과 버리는 공동체의 문제를 따져보는 일은 살아있는 논리와 개념을 익히는 중요한 현장이다. 사실 새로운 논리란 부딪침이 없으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갈등 많은 사회는 살아있는 논리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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