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 출신이오? 공부 안 해서 인문계도 못 간 사람을 어떻게 받습니까?”(금융공기업 A 인사담당자)
“우리 회사는 업무 특성상 전문계고 출신을 받기 힘듭니다. 직원 중에 전문계고 출신은 한 명도 없어요.”(국토해양부 산하 공공기관 B 인사담당자)
‘학력보다 실력이 우선’이라는 정부의 거창한 슬로건은 적어도 공공기관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전문계 고교 출신 지원자에게 가점(加點)을 주는 등 우대책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부분의 공공기관은 “학력 차별이 없기 때문에 우대도 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계약직 한 자리조차 채용의 문을 열지 않은 공공기관이 대부분일 정도로 현실의 벽은 높았다.
동아일보 경제부가 21일 중앙부처 산하 공기업과 준정부기관(500인 이상) 55개 인사팀을 대상으로 전수조사를 한 결과 공공기관 신규채용 직원 중 전문계고 출신 비중은 1.1%에 그쳤다. 그나마 20명을 선발한 한국가스공사를 빼면 비중은 0.25%로 떨어진다. 이명박 대통령이 “나도 야간 상고 출신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학력이 중요한 게 아니다”라며 상고 출신 은행원들을 격려했지만 99%의 전문계고 졸업생에게 공공기관은 ‘구름 위의 성전’ 그 자체였다.
○ 학력 인플레와 편견이 문제
외견상 공공기관 채용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학력차별 철폐를 권고한 후 2007년 기획예산처(현 기획재정부)가 채용 시 학력제한을 없애는 내용의 공공기관 인사지침 개정안을 발표했고, 지난해에는 국무총리 주재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학력차별 완화를 위한 학력규제 개선방안’을 확정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기업은 채용공고에 “학력과 나이, 성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공공기관 인사 담당자들은 학력 인플레이션이 워낙 심해 전문계고 졸업생을 받을 여지가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주택금융공사의 한 관계자는 “입사지원을 받으면 석·박사가 많아 대졸조차 차별받을 판에 전문계고 출신까지 배려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난해 대학 진학률이 79%를 기록할 정도로 학력 인플레가 심한 상황에서 공공기관에 입사할 정도의 인재라면 대학은 기본이라는 게 공공기관 경영자나 인사담당자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전문계고 출신들의 생각은 다르다. 기능직 경리나 현장 설비직 등 전문계고 출신이 활약할 분야가 얼마든지 있는데 문호를 닫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서울의 모 공고 교사는 “산업인력공단에서 공고에서만 딸 수 있는 자격증 보유자를 우대한다고 해서 졸업생 몇 명이 응시했지만 죄다 떨어졌다”며 “알고 보니 대학 전공을 더 인정해줘 자격증은 무용지물이었다”고 말했다.
○ 학력차별 철폐가 역차별 부른다
일각에선 학력차별을 없앤 게 오히려 역차별을 불러왔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공공기관 채용은 ‘대졸-전문대졸-고졸’로 분리돼 있었지만 노무현 정부 들어 차별 철폐를 이유로 이런 제도가 모두 사라졌다. 과거에는 비록 고졸 출신이 승진에 제한을 받는 등 다소 차별을 받긴 했지만 적어도 공공기관에 들어갈 문 자체는 열려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학력제한 없이 뭉뚱그려 뽑기 때문에 전문계고 출신이 석·박사와 직접 경쟁해야 하고, 여기서 살아남을 고졸 출신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대한석탄공사 인사팀의 한 관계자는 “고졸 직급을 따로 뽑던 1980년대 말까지는 하위 직급에 전문계고 출신이 꽤 들어와 업무도 잘했지만 요즘은 학력제한 없이 채용공고를 내다 보니 지원자 중 대졸 이상 학력자가 95% 이상을 차지한다”고 전했다. 국회, 감사원 등으로부터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적 줄세우기’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고 전문계고 출신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상당수 공공기관 인사 관계자의 하소연이다.
현실이 이런데도 정부는 전문계고 출신의 공공기관 채용 확대에 소극적이다. 정부는 2009년 전문계고 출신을 공공기관 채용 때 우대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지난해에는 인사운영 지침을 개정해 전문계고 출신 채용실적을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반영하겠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방침은 세우지 못한 채 손놓고 있는 상황이다.
재정부 조경규 공공정책국장은 “마이스터고와 전문계고 출신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겠다는 정부 방침은 확고하지만 전문성이 필요한 직종도 적지 않은 만큼 공공기관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공공기관들은 정부가 경영평가에 반영할 경우 당장 올 하반기부터라도 전문계고 채용을 적극 검토하겠다는 입장이다. 공무원연금공단 관계자는 “공공기관은 모든 게 정부가 정한 경영평가지침 위주로 돌아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게 경영진의 생각”이라며 “전문계고 출신 우대 등 지침만 내려오면 어떻게든 정부 의지를 반영하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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