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영역에서 어떤 현대시가 출제된다 해도 △시적 화자의 처지 △시적 화자의 정서 △표현 기법 등을 기본적으로 파악해야 문제를 풀 수 있다. 올해 수능과 교육방송(EBS) 교재 및 강의와의 연계율이 70%라고 해도 난이도 조절을 위해 1개 이상의 생소한 작품을 출제할 가능성이 있다.》
수능에 출제되는 시는 감상(感賞)보다는 독해(讀解)에 적절한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 수험생이 충분히 정답의 단서를 시 속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 따라서 언어영역의 시 관련 문제를 풀 때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독해해야 한다. 낯선 작품이든 낯익은 작품이든 상관없다. 오세영의 시 ‘모순의 흙’을 보자.
흙이 되기 위하여/흙으로 빚어진 그릇 언제인가 접시는/깨진다. 생애의 영광을 잔치하는/순간에 바싹 깨지는 그릇/인간은 한 번/죽는다. 물로 반죽하고 불에 그슬려서/비로소 살아 있는 흙 누구나 인간은 한 번쯤 물에 젖고/불에 탄다. 하나의 접시가 되리라./깨어져서 완성되는 저 절대의 파멸이 있다면 흙이 되기 위하여/흙으로 빚어진/모순의 흙, 그릇. 오세영 ‘모순의 흙’
이 시는 깨어짐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삶을 그린다. ‘그릇’은 언젠가 쉽게 깨어져 흙이 된다. 그럼에도 흙은 그릇으로 빚어진 것. 이런 모순을 인간의 삶에 적용해 ‘생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지만 결국 죽는다는 깊은 통찰을 드러낸다. 우리는 언젠가 깨어질지라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고 그런 삶이 의미 있음을 말하는 작품이다.
오세영의 또 다른 시 ‘먼 그대’는 운명적인 그리움을 표현했다.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 /이별의 뒤안길에서 촉촉이 옷섶을 적시는 이슬, 강물은 /흰 구름을 우러르며 산다. 만날 수 없는 갈림길에서 /온몸으로 우는 울음. 바다는 /하늘을 우러르며 산다. 솟구치는 목숨을 끌어안고 /밤새 뒹구는 육신.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리움에 산다. 닿을 수 없는 거리에 /별 하나 두고, 이룰 수 없는 거리에 /흰 구름 하나 두고,
오세영 ‘먼 그대’
그리움이란 누구나 지닐 수 있는 감정이다. 이 작품은 그리움은 고통과 시련을 동반하며 끝내는 해소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같은 문장 구조를 적절히 반복하며 시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
바람소리도 호개도 인젠 무섭지 않다만 어두운 등불 밑 안개처럼 자욱한 시름을 달게 마시련다만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더운 북간도 술막 (하략)
이용악 ‘전라도 가시내’
이용악의 시 ‘전라도 가시내’는 북간도로 떠난 민족의 비애를 그린다. 북간도의 술집에서 남쪽의 여자와 북쪽의 남자가 만난다. 시의 화자는 추위에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온 함경도 사내’다. 그가 애틋한 사랑의 마음으로 보는 여자는 ‘눈이 바다처럼 푸르’고 ‘까무스레한 얼굴’의, 술 따르는 주막 여인 ‘전라도 가시내’다.
시절은 흉흉하다. 어디서 흉참한 기별이 뛰어들 것만 같고, 두터운 벽도 이웃도 못 미덥다. 둘은 술상을 놓고 앉아 객수(客愁·객지에서 느끼는 쓸쓸함이나 시름)를 달래고 있다. 4연 이후에는 같은 처지의 고국 여인에 대한 화자의 절절한 연민과 사랑이 표현된다.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비애야! 개찰구에는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 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路線)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오장환 ‘The last train’
오장환의 ‘The last train’은 비애의 시대가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이 시에서 표면적으로 마지막 기차에 실어 보내려고 하는 것은 비애, 병든 역사, 추억이다. 이 세 가지는 결국 ‘비애의 추억이 엉킨 병든 역사’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멀리 놓고 나는 바라보기만 했었네. 들길에 떠가는 담배 연기처럼 내 그리움은 흩어져 갔네. 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 많이 있었지만/어쩐 일인지? 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말았네. 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 드레박질이여. 사랑해 주고 싶은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하늘은 너무 빨리 나를 손짓했네. 언제이던가/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 그대의 소맷속 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 아퍼 못 다한 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가벼운 눈인사나, 보내다오. 신동엽 ‘담배 연기처럼’
지나간 삶에서 느껴지는 회환을 그린 신동엽의 시 ‘담배 연기처럼’을 보자. 이 시는 지난 시절 겪었던 여러 사람, 삶에 대한 그리움, 회한을 표현했다. 이 감정을 담배 연기의 심상을 통해 형상화했다.
화자는 죽음을 맞이하며 과거를 회상하고 그제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족들을 마음껏 사랑하지 못했음을 후회한다. 자신의 그 감정을 들길에 남겨두고 누군가가 그 들길을 지날 때 감정을 알아봐주길 바란다.
다음 작품은 정약용이라는 실존 인물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지식인의 고뇌와 인간적 그리움을 잘 보여 주는 정일근의 시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다. 이 시에서 ‘섬’은 대상에 대한 그리움과 그리움이 응집된 한(恨)을 의미한다.
(전략)第二信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새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流配)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어루어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 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의재(四宜齎)에 앉아 시(詩)몇 줄을 읽으면 아아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 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정일근 ‘유배지에서 보낸 정약용의 편지’
이 외에도 EBS 운문문학 교재엔 이형기의 ‘폭포’와 ‘등’ 등의 시가 있다. 이형기의 폭포는 존재에 대한 비극적인 인식을 담았고 후자는 현대인의 자기 소외를 그렸다.
이만기 위너스터디 언어영역강사
이형기의 ‘폭포’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대 아는가./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내려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이 작품은 2009 개정 교육과정의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 이형기의 ‘등’은 생소한 작품인데 신체 부위를 소재로 하고 있다. ‘등’을 한몸이지만 ‘대면할 길이 없는 타자’로 인식하는 것. 자기 자신을 낯선 객체로 인식한다.
민족 분단의 아픔을 그린 김종삼의 ‘민간인’, 가난하고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회상을 그린 김명인의 ‘머나 먼 곳 스와니1’, 삶의 의미를 돌아보며 삶의 의지를 표현한 오규원의 ‘순례의 서’, 존재와 부재의 인과적 사슬을 그린 오규원의 ‘아이와 망초’, 슬픔과 함께 하는 삶에 대한 수용 자세를 노래한 황인숙의 ‘슬픔이 나를 깨운다’ 등의 작품도 EBS 운문문학에 수록된 생소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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