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회 2635개, 학술지 1885종… ‘질보다 양’ 치닫는 대한민국 학계 현주소

동아일보 입력 2010-09-10 03:00수정 2010-09-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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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쉽게 내려고… 지역따라 끼리끼리… ‘F학점 학회’ 난립 《국내에는 한국연구재단 등록 기준으로 2635개의 학회가 있다. 학회만큼 학술지도 넘쳐난다. 한국연구재단에 등재되거나 등재후보인 학술지는 총 1885종에 이른다. 국내 학술지 등에 대한 재심사를 시작한 1998년에 56종에 그친 것과 비교하면 34배나 늘어난 것이다. 실제로 국내 연구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학회는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하지만 양적인 팽창으로 연구수준이 떨어지는 학회가 양산되면서 국내 연구 전반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지난해 한국연구재단의 한 직원은 불편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국회의원실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A 학회라는 곳에서 학술지 등재 신청을 했는데, 왜 선정이 안 되고 있습니까. 심사를 게을리 하는 것 아닙니까.” A 학회는 전직 국회의원이 학회장으로 있는 곳이다.

등재후보지 선정에 필요한 기초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한 상황인데도 등재 압력이 들어온 것이다. 이처럼 학술지 심사 기간이 되면 등재 청탁 전화가 수십 통씩 걸려온다. “당신한테 부탁해서 안 되면 누구한테 하면 되느냐”고 묻는 교수도 있다. 8월 말 현재 국내에는 2635개의 학회, 1885개의 등재 및 등재후보 학술지가 난립해 있다. 포화상태에 이르렀지만 학술지 등재후보 신청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사무실도 없이 대학원생과 교수로만 근근이 운영하는 학회가 수준 이하의 학술지를 내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 인문계열, 교육학 문제 심각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에 등록된 학회 중 교육학 분야에서 ‘유아교육’ 관련 학회는 몇 개나 될까. 1975년 설립돼 가장 오래된 한국유아교육학회를 비롯해 학회 이름에 ‘유아’가 들어간 교육 분야 학회는 모두 26개였다. 영유아교육학회, 한국발도로프유아교육학회, 한국발도로프영유아교육학회, 대한민국유아합기도학회 등이다. 이 중 학회 발간 학술지가 등재지, 또는 등재후보지인 곳은 7개뿐이다. 이름만 봐도 유사한 학회는 이 밖에도 많다. 특히 이공계열보다 인문·사회과학계열에서 두드러진다. 교육학 분야는 176개, 법학은 93개, 역사학은 91개 학회가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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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영역을 다루는데도 지역, 대학마다 학회가 차려지기도 한다. 2000년에 설립된 한국인터넷전자상거래학회와 한국전자상거래학회는 각각 등재, 등재후보 학술지를 갖고 있다. 한국인터넷전자상거래학회 편집위원장인 동국대 문태수 교수는 “두 학회에서 다루는 영역은 거의 비슷한 걸로 알고 있지만, 각각 영호남 지역과 수도권·충청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법학 분야에는 연세법학회, 안암법학회, 한양법학회 등 대학을 기반으로 같은 대학 출신끼리 모여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역사학 분야에도 지역 기반 학회가 많지만 대부분 학회가 지역사가 아니라 특정 지역과 시대에 국한하지 않는 종합사를 연구한다고 밝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유사한 영역에 세분화한 학회가 많다 보니 교수마다 학회 서너 개 가입은 기본이다. 서울대 경제학과의 한 교수는 “방학마다 학회를 따라다니느라 자기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교수가 적지 않다”고 전했다.

○ 군소학회 제대로 된 결과물 못내

지난해 아토피예방교육연구회라는 곳이 설립됐다. 등재 및 등재후보 학술지는 없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오래전에 올린 아토피예방교육에 관한 글 한두 개를 빼고는 ‘대출 마이너스 통장’과 같은 스팸 광고만 가득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국내 학술단체에서는 학문 영역을 세분화한 ‘분과학회’를 세우는 바람이 불었다. 분과학회는 내부 교류가 활발하고 연구에 전문성이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나치게 학문 영역을 세분화하면서 학회 구실을 못하는 곳도 생겨나고 있다.

2007년 한국학술진흥재단에 등록된 2373개 학술단체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 38%는 사무직원이 없고, 33%는 사무공간이 없다. 그만큼 이름뿐인 학회가 많다는 뜻이다. 또 조사 대상 학술단체 중 절반이 넘는 52%는 1년 예산이 5000만 원 이하로 영세했다. 이런 학회들은 대개 대학원생을 활용해 근근이 꾸려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소재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모 씨(25·여)는 “교수님들이 만든 학회가 너무 많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며 “지도교수 학회 일을 맡아 하느라 자기 공부를 못하는 대학원생들이 많다”라고 털어놨다.

일부 신생 학술지는 게재할 논문을 구하지 못해 대학원생이 쓴 수준 이하의 논문을 받아 학술지 분량을 채우는 것으로 알려졌다. 등재 학술지가 아니면 논문을 게재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에 등재되지 않은 신생 학술지는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 서울대 사범대의 한 교수는 “일부 신생 학술지는 교수 논문을 받아내기 위해 ‘영업’을 뛰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KCI 등록 학회가 가장 많은 교육학 분야의 경우 최근 5년간 학술대회를 한 차례도 열지 못한 학회가 59곳에 이른다.

○ 교수 승진 논문 쉽게 내려 만들기도

최근 광고업계 실무 경력이 있는 교수들이 모여 광고학 분야 학회를 만들었다. 이 분야를 잘 아는 한 교수는 “현장에 있다가 뒤늦게 학교로 자리를 옮기면서 광고학회 주류 편입이 어렵다고 판단해 새 학회를 만든 것 같다”고 전했다. 이 교수는 “작은 학회라고 해도 학회장 등을 지내고 경력을 쌓으면 나중에 광고상 심사위원 등으로 초빙되고 별도 수입도 생긴다”며 “광고 관련 학회가 많은데도 굳이 새 학회를 만드는 이유”라고 말했다.

대학들이 연구업적 평가를 강화하면서 교수 승진 때문에 학회 신설과 학술지 등재에 목을 매기도 한다. 대학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대학이 등재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면 승진 점수를 준다. 학회 임원을 지내면 대외 활동 점수로 인정된다. 교수들 사이에서 ‘학회 만들기 전공’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여섯 군데 학회를 만들고 학회 임원 경력을 쌓으려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논문 심사를 쉽게 통과하기 위한 방편으로 학회를 세우거나 학회 임원이 되는 경우도 있다.

교육 분야 학회장을 맡고 있는 서울대 사범대의 한 교수는 “학회장이나 편집위원장 등 임원을 맡으면 자기 논문을 자기 학회에 내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원칙”이라며 “이는 논문 심사가 공정하게 이뤄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임원으로 있는 학회에 자기 논문을 내는 사례가 많다. 한 교육학 분야 교수는 2007년 1월부터 최근까지 자신이 발표한 논문 48건 중 17건을 자신이 편집위원장으로 있는 학회지에 실었다. 한 법학자도 2007년 5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제출한 논문 5건 중 4건을 자신이 편집위원장으로 있는 학회지에 게재했다. 편집위원장은 학회지에 제출하는 논문의 최종 심사 권한을 갖고 있다.

서울대 이봉진 연구부처장은 “등재·등재후보지라고 해서 무조건 정부가 운영자금을 지원해 줄 것이 아니라 학회의 성과와 내실을 따져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정부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학회는 자연스럽게 도태돼 학회 간 통합과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강경석 기자 coolup@donga.com

▼ 한국연구재단 KCI 연내 개발 “한국판 SCI 활용하면 공정평가에 도움” ▼

미국에 SCI가 있다면 한국에는 KCI가 있다. SCI는 미국의 톰슨로이터사가 개발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이다. SCI에서 학술지를 검색하면 해당 학술지의 영향력 지수인 피인용지수(Impact Factor)가 함께 뜬다. 지수가 높으면 그만큼 다른 논문에서 인용이 많이 된 영향력 있는 논문이라는 뜻이다.

학계는 국내 학회의 난립을 막고 자연스러운 학회 간 통합과 연계를 유도하기 위해서는 SCI 같은 객관적인 학술지 평가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 회장인 서울대 우한용 교수는 “분과학회들을 무조건 통합시키고 도태시키려 하기보다는 모(母)학회가 이들 학회가 자연스럽게 유기적인 연계를 맺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며 “학회와 학술지의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객관적이고 엄격한 평가 시스템이 필수”라고 지적했다.

한국연구재단은 올해 하반기 서비스 시작을 목표로 KCI(한국학술지인용색인·Korea Citation Index)라는 한국판 SCI를 개발하고 있다. KCI는 국내 학술지의 인용지수를 활용한 학술지 평가 시스템이다. 학술지와 게재된 논문 정보뿐만 아니라 SCI처럼 학술지와 논문의 피인용 횟수를 산출한 IF가 함께 제시된다.

그동안은 국내 연구자의 연구업적을 평가할 때 SCI급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수를 위주로 하다 보니 우수 논문이 해외로 유출되고 국내 학술지는 위축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한국연구재단은 또 KCI에 등재된 학술지에 대해 3년에 한 번씩 주기적인 학술지 평가도 할 계획이다.

한국연구재단 연구진흥본부 배영찬 본부장(한양대 교수)은 “KCI가 개발되면 경쟁력이 없는 학회 및 학술지의 난립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이를 통해 국내 논문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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