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평화재단 국제심포지엄]<1부>동아일보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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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4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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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창간 90주년-일민 탄생 100주년

“日帝땐 민족의 상징… 광복이후 민주-문화의 보루”

《동아일보 창간 90주년과 일민 김상만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 부설 화정(化汀)평화재단·21세기평화연구소(PEACE21), 일본 아사히신문 아시아네트워크(AAN), 중국 현대국제관계연구원(CICIR)이 공동 주최로 27일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한중일의 협력과 신뢰 구축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국제 심포지엄을 열었다. 1부 ‘동아일보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에서는 동아일보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미친 영향을 재조명하고 동아일보 사장과 회장을 지낸 일민 김상만 선생의 발자취를 되돌아봤다. 2부에서는 한중일 신뢰 구축을 위한 동아일보 아사히신문 런민일보의 역할을 모색했다. 김학준 동아일보 고문은 개회 인사에서 “동아일보는 ‘동아(東亞)’라는 제호에서 볼 수 있듯이 1920년 창간 후 지속적으로 동아시아 평화 정착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말했다. 심포지엄에서는 한중일 전문가 7명이 주제 발표를 했으며, 학자 언론인 대학생 등 2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다음은 심포지엄 내용 요약이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이지연 기자 chance@donga.com
[정치사회에 미친 영향 - 진덕규]
창간이래 시대정신 구현… 시민사회 여는 향도 역할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된 이래 최근까지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시대정신을 구현해 왔다. 일제강점기(1910∼1945년)에는 민족적 상징체계로, 국가체제 확립기(1945∼1960년)에는 국민국가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산업화 통치기(1961∼1987년)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보루였고 민주화 정치기(1988∼2008년)에는 성찰적 시민사회의 실현을 위해 매진해 왔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를 창간한 주체들은 신학문을 학습했던 근대주의자이자 민족의 전통성을 보존하면서 새 사상도 수용했던 민족주의자들이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조선공산당 등 일부 청년층의 급진주의 바람이 불었지만 곧 한계를 드러냈다. 독립을 위해서는 합법적이고 장기적인 투쟁이 필요하고 민족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새로운 민족운동을 통해 실천적인 노력을 펼친 동아일보는 나라가 없던 시기에 우리 정부, 우리나라와 같은 존재였다.

광복 이후 1960년까지 계급독재나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국가의 실현이 국민국가의 핵심으로 여겨졌다. 동아일보는 이런 국민적 욕구를 수용해 국민국가 실현을 이끌었다. 계급독재의 급진주의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고수했고, 이룰 수 없는 남북협상의 환상에서 벗어나 민족적 현실주의를 실천했다.

1961∼1987년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통한 국민 동원의 통치 시기에 동아일보는 군사정권에 항거했고 이 과정에서 광고 탄압과 기자 해직 사태 고초를 겪었다.

1988∼2008년 민주화 정치기에 동아일보는 성찰적 시민사회로의 향도적 일을 맡았다. 1987년 6·29선언 이후 평화적 정권교체로 제도적인 민주화는 이뤄졌으나 특정 민주화 투사들이 권력을 점유하면서 곳곳에서 파열음을 일으키며 민주주의의 질적인 문제를 낳았다. 지금 이 시점에서 요구되는 시대정신은 문화시민의 실현이다. 동아일보는 앞으로 문화시민의 새 정치사회 구현에 앞장서야 한다.


[민주주의와 문화민족주의의 길 - 유종호]
계몽적 열정-인재 육성… 비약적 국가발전 밑거름

동아일보는 1920년 창간사에서 문화주의를 제창해 문화적 민족주의의 길을 천명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사람다운 삶을 위한 투쟁은 정치적 실천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만 중층적인 외압으로 괄목할 만한 결과를 빚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문화적 실천에서는 상대적으로 큰 성과를 거둬 광복 이후 우리 사회가 이룩한 비약적 발전의 실질적 기반이 됐다.

동아일보가 일제강점기에 수행한 문화적 실천은 계몽적 열정과 문화 민족주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진 지속과 혁신의 역정이었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위기는 민족어의 위기로 인식하고 우리말 지키기에 앞장섰다. 1933년 10월 조선어학회는 ‘한글 철자법 통일안’을 발표했는데 동아일보는 같은 해 4월 1일자 사설 ‘한글 철자법과 13단제’를 통해 사실상 조선어학회의 통일안 채택을 선포했다. 1931∼34년 네 차례에 걸쳐 ‘학생 하기(夏期) 브나로드 운동’을 벌여 문맹 퇴치에 힘썼고, ‘아는 것이 힘’이라는 구호를 보급했다. 1925년 신춘문예를 시작해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고 역사소설과 사회소설을 연재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당대의 사회문제를 부각했다. 1931년 월간지 ‘신동아’, 1933년 여성지 ‘신가정’을 창간해 여성과 어린이를 가정과 사회의 중심부로 끌어들였다.

동아일보는 문화 예술과 스포츠 행사를 주최하거나 주도적으로 후원했다. 1921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독창회인 야나기 가네코의 공연을 주최했으며 같은 해 ‘동우회극단’이 서울, 부산 등 13개 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펼쳤다. 1921년 호남야구대회와 남조선정구대회를 후원했고, 1923년 전조선여자정구대회, 1931년 동아마라톤대회를 개최했다.

최근 시청각 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퍼지는 대중문화로 문화적 포퓰리즘 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동아일보는 이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격조 있는 교화적 기능을 발휘하는 지혜를 보여줘야 한다.
[동아방송과 방송의 미래 - 강현두]
방송史 획 그은 프로 많아… 고품격 미디어 재현 기대


동아방송은 1963년 4월 25일 개국해 1980년 신군부의 언론 강제통폐합으로 폐국되기 전까지 한국 방송사에 획을 긋는 창조적이고 개척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동아방송은 새로운 고품격의 방송, 새로운 저널리즘의 방송, 새로운 문화의 방송 시대를 열었다. 1963년 국내에서 방송 저널리즘의 시대를 연 동아방송은 선진국 방송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동아방송이 폐국되지 않고 TV 방송도 했다면 삼성이 세계시장을 누비듯 동아방송도 초일류 미디어그룹이 돼서 방송·문화산업을 선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동아방송은 정시 뉴스만 매일 15회 넘게 편성해 다른 방송사보다 2, 3배 많았다. 다른 방송사들은 아나운서가 ‘읽는’ 뉴스를 내보냈으나 동아방송은 데스크들이 직접 진행을 맡아 ‘보도하는’ 뉴스로 방송 뉴스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뉴스의 신뢰성은 낭독자나 기자의 용모가 아니라 진행자의 저널리즘 전문성과 뉴스의 정확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지금도 일깨워준다.

동아방송은 사실과 허구가 조화를 이룬 ‘여명 80년’ 등의 다큐드라마를 만들어 허구의 멜로드라마가 주를 이루던 한국 방송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동아방송의 생방송 공개토론 프로그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는 세계 방송사에 기록될 만한 가장 용기 있는 편성이다. 동아방송이 오랜 언론 탄압을 견뎌낸 동아일보의 방송이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제를 어젠다로 삼는 생방송 토론이 가능했다.

우리는 (미디어관계법의 개정으로) 새로운 민영 미디어 시대를 맞고 있다. 하지만 정부 지원을 받는 공영방송과 사적 자산을 모두 투자해야 하는 민영방송이 함께 경쟁하는 현 체제는 민영방송에 매우 불공정한 만큼 제도적 구조적 개혁이 동반돼야 한다. 우리 방송의 저급한 현실을 보면서 고품격 방송을 하던 동아방송을 새 시대의 방송으로 기대한다.



[동아일보와 일민 김상만 - 강인섭]
권력의 외풍 앞장서 막아… 문화주의 실천한 선각자


일민 김상만 선생의 생애는 우리 민족사와 굴곡을 함께한 근현대사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일민 선생은 나라를 일제에 빼앗긴 1910년에 태어나 식민지 치하에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가 열 살이던 1920년에 동아일보가 창간됐고 일민 선생은 194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1994년 생을 마칠 때까지 신문 경영에 노력을 쏟아 부었다.

일민 선생은 직접 글을 쓰거나 신문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신문을 사랑했고 방송을 아낀 진정한 언론인이었기에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언론 자유를 지키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동아일보를 정상의 신문으로 키워낸 숨은 공로자이자 동아일보가 한국의 대표적 신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한 주역이었다.

일민 선생은 국제언론인협회(IPI) 활동에 참여하며 동아일보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IPI는 정치적으로 가혹했던 시기에 일민 선생이 한국 언론 자유 발전에 기여한 점을 평가해 ‘자유의 금펜상’을 수여하고 종신회원으로 예우했으며 미국 미주리대 신문연구소도 그를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선정했다.

일민 선생은 동아일보의 문화주의를 실천했으며 황무지나 다름없던 1960년대와 1970년대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에 세계와의 통로를 열어준 선각자였다. 일민 선생은 온 나라가 경제발전에 치중하던 시기에 문화예술에 관심을 갖고 영국의 로열발레단 등 세계적인 공연 단체를 서울에 초청했다. 또 동아음악콩쿠르, 동아무용콩쿠르, 미술제전, 공예전을 마련해 인재 등용과 신인 발굴의 기회를 꾸준히 제공해 왔다.

동아일보는 창간 90주년을 맞아 종합미디어그룹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과거는 미래의 거울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기에 동아일보와 일민 선생이 하나가 돼 동아일보를 이끌어갔던 지난날의 발자취를 재조명해서 길을 찾아야 한다.
[참석자 명단]


1부
∇사회
박영상 한양대 명예교수
∇주제 발표
진덕규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유종호 예술원 회원
강현두 서울대 명예교수
강인섭 전 국회의원·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2부
∇사회
황호택 동아일보 논설실장
▽주제 발표
이수항 동아일보 2020위원회 부국장
와카미야 요시부미(若宮啓文) 일본 아사히신문 칼럼니스트
왕팡(王芳) 중국 런민일보 국제부 부주임·고급기자
▽토론
후지와라 히데히토(藤原秀人)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후지핑(胡繼平) CICIR 원장실 주임
김은미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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