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e TOWN]3~5쪽 읽은 뒤 곱씹고 또 곱씹고…느린 독서, 깊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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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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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철학올림피아드 국내예선 금상 김태헌 군

왜? 그래서? 자문하며 생각의 지평 계속 넓혀
책 한 권을 읽는 데 한 달 걸릴 때도 있어요

《‘현실과 환상과 꿈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는가?’

한국외국어대부속용인외고 3학년 국제반 김태헌 군(18)은 우선 문제 속에서 ‘현실’ ‘환상’ ‘꿈’ ‘분간’이란 키워드를 골라낸다. ‘세 가지를 구분하기에 앞서 현실, 환상, 꿈 간의 공통점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고민한 김 군. 문제에서 골라낸 키워드로부터 자신의 고민에 대한 답을 찾고, 이를 다시 여러 개의 키워드로 정리한다. 김 군은 철학자들의 사상을 마구잡이로 인용하기보단 ‘imagination’ ‘dream’ ‘vivid’ ‘have something in common’ 등 자신이 생각해 낸 키워드를 연결하며 생각을 문장으로 완성시켰다.》

1월 10일 치러진 제18회 국제철학올림피아드(IPO) 국내 예선에서 금상을 수상한 김 군이 문제를 접하고, 생각하고, 글로 표현하기까지의 과정이다. 김 군은 “내 생각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 대회에 참여했다”면서 “상을 받은 것도 좋지만 문제가 물어보는 질문을 정확히 파악하고, 내 생각을 명확히 표현한 것 같아 뿌듯하다”고 말했다.

한국철학회가 주최한 이번 대회에선 학생들의 △문제해결을 위한 통찰력 △논변 구성 능력 △창의적 사고 능력 △언어적 표현 능력을 평가했다. 대회에 대비하기 위해 학원을 다니거나 기출문제 등을 풀어보지 않았다는 김 군. 그의 창의적 사고 능력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은 어떻게 길러졌을까?

김 군은 어려서부터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다. 김 군은 “매일 잠자기 전 침대에 누워 ‘우주의 끝은 어디일까’ 등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이 즐거웠다”면서 “당시 생각에 그치고 답을 낼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 답답했다”고 말했다.

이런 답답함은 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점차 해소됐다. 학교공부를 통해 생각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배경지식이 쌓이기 시작한 것. 초등학교 3학년 때 ‘생각’을 연구하는 ‘철학’을 알게 된 후에는 관련 책을 사서 읽는 등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김 군이 자신의 생각에 대한 답을 얻는 주된 방법은 독서다. 그는 “문학 작품도 결국 개인의 생각을 글로 표현한 결과물”이라며 “단순히 책을 읽고 해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 생각으로 발전시키는 과정이 흥미롭다”고 말했다.

김 군은 ‘다독(多讀)’보단 ‘정독(精讀)’을 즐긴다. 3∼5쪽을 읽고 책의 내용을 곱씹고 작가의 생각을 파악하기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니 책 한 권을 읽는 데 한 달이 걸리기도 한다. 그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

“미국 델라웨어 주에서 살다가 아홉 살 때 국내로 돌아왔어요. 처음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에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겉돌았죠. ‘데미안’에 나오는 주인공이 그 당시 제 모습과 비슷해요. ‘성스러운 공간’으로 표현되는 집과 ‘악이 팽배한’ 바깥 세계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거든요. 그런 주인공을 도와주는 인물이 데미안인데, 딱 저한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천천히 생각하며 읽는 독서습관은 학교 공부에도 도움이 됐다. 예를 들면 세계사 책을 보다가 ‘아랍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란 부분에서 잠시 멈춘다. 그리곤 ‘종교가 공존하게 된 원인이 뭔지’ ‘그래서 발생한 사건이 무엇인지’ ‘그 사건은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차분히 다시 생각하는 것. 김 군은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이야기에 빠져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 채 계속 책을 읽을 때가 있다”면서 “책 읽기를 잠시 멈추고 사건의 인과관계를 되짚어보면 암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에서 김 군은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잘 표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 군은 어렸을 때 미국에서 익힌 영어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일상에서 영어로 말하고 쓰는 연습을 꾸준히 해 왔다.

김 군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아이디어 노트’를 만들었다.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영어로 노트에 기록한 것. 지난해 여름방학에는 ‘사람들은 사물을 묘사할 때 어떤 표현을 쓰나’에 관심을 갖고 관련된 표현들을 정리했다. 김 군은 영국 유명 밴드인 비틀스의 노래 ‘Yellow Submarine(노란 잠수함)’에서 바다를 초록색으로 표현한 부분(Till we found the sea of green)이 흥미로웠다. 이를 적어놓은 뒤 ‘태양이 먼지를 비출 때 우리 눈에 보이는 먼지는 핑글핑글 도는 금빛가루 같다’ 등 응용한 표현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주위에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많다는 점도 영어 감각을 유지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김 군은 평소 주위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려고 노력한다. 단순한 일상대화가 아닌 주제가 있는 토론을 하는 것을 즐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영어토론대회에 참가하게 됐고 결과도 좋았다. 지난해에는 한국토론연맹에서 주최한 전국토론대회, 고려대에서 주최한 토론대회에서 우승했다.

김 군은 “영어토론은 사전 준비도 중요하지만 순발력과 집중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런 연습을 하다보니 글을 쓰는 속도가 빨라졌고 내용이 정확해졌다”고 말했다.

김 군은 요즘 ‘어느 대학에 진학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 하지만 그가 이루고 싶은 최종목표는 분명하다.

“호텔경영인이 돼서 모든 나라에 제 호텔을 세우는 게 꿈이에요.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녜요. 세계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많은 사람의 생각을 듣고 싶어요. 돈과 같은 물질이 목적이 아닌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것. 정말 매력적인 일 아니겠어요?(웃음)”

이승태 기자 st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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