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청업체는 나의 봉”… 칼만 안 든 원청직원

  • 입력 2009년 8월 13일 02시 59분


울산에서 자동차 부품 수출 포장업체를 운영하는 곽모 사장(69)은 지난해 4월 원청업체인 모 대기업 김모 과장(54)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딸이 곧 결혼하니 협조해 달라”는 전화였다.

하청업체를 관리하는 김 과장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한 곽 사장은 결혼 날짜 며칠 전에 200만 원을 봉투에 넣어 축의금으로 전달했다. 하지만 김 과장은 돈이 적다는 듯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필요 없다”면서 돈 봉투를 던져버렸다. 이에 곽 사장은 300만 원을 보태 500만 원짜리 봉투를 만들어 김 과장에게 전달한 뒤에야 ‘화’를 풀 수 있었다.

울산지방경찰청은 12일 하청업체로부터 금품을 뜯어낸 원청업체 직원 2명에 대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상습 공갈)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수시로 금품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 자녀 차량 구입비도 떠넘겨

김 과장은 자녀의 차량 구입비도 곽 사장에게 떠넘겼다. 김 과장은 2007년 소형 차량을 구입하면서 곽 사장에게 차량 등록비 300만 원을 내도록 했다. 월 69만 원인 자동차 할부금도 지로 통지서를 곽 사장에게 보내 1년간 대납하도록 했다. 2007년 11월부터는 자신이 아는 술집 주인의 계좌로 매월 100만 원씩 총 1500만 원을 받았다. 납품 대금 입금 시점에는 100만∼200만 원씩, 매월 12월 서울 본사 회의 참석 때는 출장비와 접대비 명목으로 100만 원씩을 곽 사장에게서 받아갔다. 김 과장의 하청업체 괴롭히기는 하청업체 관리를 맡았던 2002년부터 7년여 동안 계속됐다. 곽 사장이 이 기간 김 과장에게 갈취당한 돈은 51차례에 걸쳐 총 7700만 원.

곽 사장은 지난해 김 과장 윗선에서 하청계약을 해지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아들에게 “김 과장에게 당한 일을 생각하니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면 용서하겠다”고 토로했다고 한다. 곽 사장 아들로부터 이 말을 전해들은 김 과장은 “곽 사장이 자진해서 돈을 줬다”며 사과를 거부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 과장은 이 같은 사실이 회사에 알려지자 올 2월 사직했다.

○ 납품대금도 꿀꺽

이날 김 과장과 함께 구속영장이 신청된 울산의 중견 선박 부품업체 고모 부장(60)도 비슷한 수법으로 금품을 갈취했다. 선박 부품을 납품하는 업체 대표 김모 사장(53)에게 올 1월 “영업을 잘하려면 다른 업체와 마찬가지로 접대를 해라”라며 협박해 300만 원을 뜯어냈다. 또 자신의 회사에서 하청업체에 지급되는 돈을 자신의 계좌로 입금시키는 등 6월까지 17차례, 5500만 원을 갈취했다. 이 회사 한모 대리(33)도 B 씨에게 800만 원을 갈취한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경찰은 경제 불황으로 경영이 어려운 중소 하청업체를 원청업체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상납을 받는 등 괴롭히는 사례가 많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계획이다.

울산=정재락 기자 rak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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