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아이들 뛰어노는 운동장에 농약 뿌리는 비닐하우스가…”

  • 입력 2008년 11월 17일 02시 49분


■ 서울 덕수초등생들 위험 무방비 노출

행안부 “국유지 놀릴 수 없어 화훼시설 만들어”

학부모 “아이들 건강 위협해도 되나” 철거 요구

14일 서울 중구 정동 덕수초등학교 앞 운동장.

직선거리로 100m도 채 안 되는 좁은 운동장을 대형 비닐하우스와 텃밭, 가건물 등 약 700m²에 이르는 화훼시설 7개동이 ‘ㄱ’자로 둘러싸고 있었다. ‘통제구역’ 푯말이 있지만 비닐하우스 정문과 텃밭은 열려 있어 누구나 쉽게 출입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매캐한 살충제 냄새로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내부는 각종 난초, 관상목, 꽃 등이 가득했다. 이 가운데 일부 난초는 ‘장관실 증’ ‘과기부 차관실’이라고 쓰인 꼬리표를 달고 있었다.

이곳에서만 300여 종, 5000개의 관상용 식물이 재배돼 총리실과 장관실을 비롯한 정부중앙청사로 공급되고 있다.

비닐하우스를 지나 가건물 창고에 들어서자 살충제 농약병 20여 개가 보관된 유리장이 눈에 들어왔다. 철없는 아이들이 마음만 먹으면 유리창을 깨고, 얼마든지 꺼낼 수 있었다.

운동장에서 만난 덕수초교 6학년 김모(13) 군은 “어느 날 갑자기 비닐하우스가 운동장을 차지해 뛰놀 공간이 좁아졌다”며 “축구공이 밭으로 넘어가 안에 몇 번 들어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운동장과 비닐하우스가 기묘한 동거를 하고 있는 이 땅은 현재 행정안전부 소유다.

본래 덕수초교 소유였지만, 도심 공동화로 취학인구가 줄면서 1995년 서울시교육청이 학교 터의 절반(4600m²)을 행안부에 넘겼다. 행안부는 2005년까지 이 터에 행정고시와 공무원 시험의 원서 접수처를 만들어 운영해 왔지만, 응시 방식이 인터넷 접수로 바뀌면서 한동안 학교 운동장으로만 사용됐다.

이에 감사원이 “국유지를 놀리지 말라”는 권고를 내리자 행안부는 2006년 이곳에 화훼시설을 만들었다. 학교 측은 남은 절반의 터로는 체육수업을 원활히 할 수가 없어 해당 터를 매년 무상 임차해 학생들에게 운동장으로 제공하고 있다.

문제의 터는 지난해 행안부가 ‘민주화운동기념관’ 건립을 추진했으나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로 무산된 곳이기도 하다.

학교운영위원회와 학부모회는 “어린 아이들이 노는 공간에 정부가 맹독성 농약 창고를 세운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며 화훼시설 철거를 요구하는 항의 공문을 지난달 말 행안부에 제출했다.

학교 측은 “농약 살포 사실을 행안부로부터 전혀 듣지 못했으며, 최근에야 학부모의 제보로 알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행안부 관계자는 “해당 터는 시교육청에서 합법적으로 넘겨받은 것으로 조경시설 설치는 학교 측과 미리 협의를 마친 것”이라며 “농약 살포는 학생 출입이 통제된 상황에서 하우스 내부에서 하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다”고 해명했다.

정찬우 학교운영위원장은 “정부가 지난해 기념관을 세워 아이들의 체육공간을 빼앗으려 하더니 이번에는 농약 창고로 아이들의 건강마저 위협하고 있다”며 “국유지 활용보다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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