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밥”… 사건수임 양극화로 서비스질 하락

  • 입력 2008년 8월 19일 03시 01분


《변호사 1만 명 시대에 들어서면서 부(富)와 명예의 대명사로 알려져 온 변호사라는 직업에 깊은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법학전문대학원 제도 실시와 법률시장 개방으로 2015년에는 변호사 수가 현재의 2배에 이를 것으로 보이지만 사건 수는 그만큼 늘지 않아 일부 로펌을 제외하고는 불황의 골이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변호사 업계의 양극화 현상은 수임료 관련 범죄의 증가와 법률 서비스 질의 하락으로 이어져 돈 없는 서민들의 피해가 커지고 있다.》

6년새 변호사 2배… ‘상위 10%’가 매출 절반가량 차지

박리다매 소송 남발… 수임료 사기-무리한 재판진행도

겸업제한 등 자정노력 관련단체 반발로 번번이 무산

○ 1인당 월간 사건 수임 3건 밑돌아

국내 법률시장의 매출 규모는 연간 1조3000억 원 안팎. 미국 대형 로펌 1곳의 매출액보다 적지만 그나마 국내 전체 변호사의 10%가 속해 있는 상위 6대 로펌이 매출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변호사 1인당 사건 수임 건수는 한 달에 3건을 밑돈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집계한 1인당 연평균 사건 수임 건수는 2002년 38.2건에서 지난해에는 31.5건으로 떨어졌다.

2002년 5000명을 넘어선 변호사는 올해 들어 두 배로 늘었지만 사건 증가율은 서울지방변호사회를 기준으로 같은 기간 40% 늘어나는 데에 그쳤기 때문이다.

더욱이 개인 변호사들은 형사 사건을 맡기조차 힘들다. 로펌 소속의 판검사 출신 전관(前官) 변호사에게 사건이 집중되는 데다 최근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국선 변호인을 이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대한법률구조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국선 변호사의 무료 형사변론을 받은 사람은 2만2494명으로, 2006년(1만7304건)보다 30%가량 늘었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처리한 전체 사건 중 국선 전담 사건은 지난해 3139건으로 전체 사건의 15.8%에 이른다.

변호사의 지갑은 매년 얇아지고 있다. 개인 변호사 업계의 평균 수임료를 경력에 따라 300만∼1000만 원으로 볼 때 변호사 1인당 한 달 수입은 700만∼2600만 원가량이다.

개인 변호사는 대개 직원 2명의 급여와 사무실 임차비, 활동비로 최소 한 달에 1500만 원 안팎을 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최근 서초동에서조차 소액 소송 사건을 월 한두 건도 맡지 못해 신용불량을 이유로 폐업하는 변호사가 적지 않다”고 말했다.

○ 수임료 관련 변호사 범죄 증가

변호사들의 형편이 안 좋다 보니 수임료와 관련한 범죄가 늘고 있다.

대법원은 올해 4월 “아버지를 석방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며 아들에게 판검사 로비 명목으로 수억 원을 뜯어낸 김모(65) 변호사에게 징역 1년의 실형을 확정했다.

6월에는 미국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독거노인 임모(79) 할머니를 속여 위임장을 받아 낸 뒤 재산 7억5000만 원을 가로챈 박모(52) 변호사가 구속됐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변호사를 징계한 건수는 2002년 15건에서 지난해 47건으로 늘었다.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수임료 관련 피해구제 신청도 2002년 325건에서 2006년 437건으로 증가했다.

의뢰인들에게 소송을 부추겨 사건을 수임하는 변호사도 늘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판사는 “변호사가 성공보수를 노리고 조정으로 끝날 사건을 무리하게 정식 재판으로 끌고 나가는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박리다매’형 집단소송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것도 업계 불황의 한 단면이다.

힘없는 개인들을 대리해 거대 집단과 싸우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상업적으로 변질돼 돈만 받고 소송은 뒷전인 점은 문제다.

7만 명의 주민이 관련돼 있는 대구 K2공군비행장의 항공기 소음 피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 2004년 8월부터 여러 변호사가 경쟁적으로 사건에 뛰어드는 과정에서 일부 주민이 소송 위임장을 이중, 삼중으로 내 소송이 지연되고 있다.

○ 변호사 사무실 문턱은 여전히 높아

경기 성남시에 사는 김모(43) 씨는 “친구에게 1500만 원가량을 빌려줬으나 차용증을 잃어버려 변호사를 찾았는데 수임료로 300만 원 넘게 요구했다”고 한다. 다른 변호사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비용이 많이 든다며 거절했다.

변호사 수가 급증하는 만큼 사건이 늘지 않는데도 수임료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고 있다.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 원리가 먹히지 않는다는 얘기다.

변호사 개업도 대부분 수도권과 광역시에 몰려 중소도시나 농촌지역에서는 변호사 사무실 문턱이 여전히 높은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불황에도 법률 서비스 접근이 어려운 이유는 국민 1인당 변호사 수가 선진국에 비해 현저히 적고 법조인들의 밥그릇 지키기가 철저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최근 변호사 수임료의 상한선을 두고 변호사에게 변리사 및 세무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제도를 폐지하는 등의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통과되긴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 국회에서도 발의됐지만 변호사 단체의 로비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판검사가 퇴직 직후 로펌에 바로 취업하는 것을 제한하자는 법안도 논의되고 있지만 반발이 만만치 않다.

서울의 한 부장판사는 “요즘은 전관예우의 유효 기간이 퇴직 후 1년 안팎으로 줄어 이 기간에 사실상 평생 먹고살 것을 벌어야 한다”며 “최근엔 로펌이 몸값 높은 부장판사보다 일 잘하는 10∼15년차 단독 판사들을 선호해 그마저도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재경지법의 한 젊은 판사는 “예전 같으면 판사가 소신에 따라 쉽게 사표를 쓰기도 했지만 요즘은 어떻게든 법원에서 살아남으려고 눈치를 보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며 “변호사 업계의 불황이 법관의 관료화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추세”라고 우려했다.

이종식 기자 bell@donga.com

▼로스쿨 첫 졸업-법률시장 개방▼

6년후에는 ‘생존 정글’ 더 캄캄

저임금 변호사 양산-시장 재편 가능성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른 법률시장 개방과 내년부터 개원하는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졸업생들이 법조계에 처음으로 진출하는 시점은 대략 2012∼2014년으로 맞물릴 것으로 보인다. 그 이후가 되면 변호사들의 생존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법조계는 전망한다.

한 달 300만∼400만 원의 임금도 마다하지 않는 고용 변호사들이 대규모로 양산돼 상당수 변호사가 극심한 구직난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법률시장 개방을 앞둔 법조계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우선 ‘몸집’부터 키우자는 것과 개방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나뉜다.

법무법인(로펌) 간 인수합병은 새삼스럽지 않다. 법무법인 지평과 지성이 법무법인 지평·지성으로 합병하는 등 상반기에만 4건의 굵직한 인수합병이 있었다.

그러나 몸집 불리기를 근본적인 대책으로 보긴 어렵다는 분석이 많다.

한미 FTA가 단시일 내에 발효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고 법률시장 개방 역시 단계적으로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법률시장 개방에 대한 대책은 개방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식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의 해외 업무 관련 자문을 주로 하는 대형 로펌의 한 중견 변호사는 “시장 개방이 이뤄져도 한국 법률에 대한 자문은 한국 변호사들이 여전한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라며 “한국 로펌들은 지금 한국 법률에 대한 전문적 역량을 우선적으로 유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로펌과 외국 로펌이 전략적으로 제휴를 하거나 인수합병으로 합작 로펌을 세운다 해도 한국 변호사와 미국 또는 영국 변호사가 팀을 꾸려 업무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형태는 사실상 기존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나 해외 기업의 국내 진출은 대부분 한국 변호사와 미국 변호사의 협업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미 FTA 발효 5년 뒤 법률시장이 완전 개방되면 사실상 그러한 구분은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기업 인수합병 전문가인 한 한국계 미국 변호사는 “토종, 외국 등 국적을 따지는 일은 의미가 없어지고 한국 시장에서도 오직 국제 경쟁력을 갖춘 로펌만 살아남아 끊임없이 법률 시장 재편을 주도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그렇게 되면 변호사들도 능력에 따라 철저히 지위와 수입이 구분되는 무한경쟁의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로스쿨 정원 변경 없을듯▼

본인가 대학 이달말 발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예비인가를 받은 25개 대학이 예비인가 내용과 같은 조건으로 이달 말 본인가를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과학기술부는 당초 9월초 본인가를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내년 3월까지 개교 준비 시간이 촉박하다는 대학들의 주장에 따라 18, 19일 예비인가 대학에 대한 현장 실사를 거쳐 인가 시

기를 앞당길 계획이라고 17일 밝혔다.

교과부는 “25개 예비인가 대학이 본인가를 받기 위해 지난달

제출한 수정 신청서를 바탕으로 이행 실적 등을 점검한 결과 규

정 위반이나 기준 미달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이에 따라 예비인가 당시 배정한 정원과 같은 정원으로 이달 말 본인가를 하게 될 것 같다”고 18일 밝혔다.

김희균 기자 foryo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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