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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25일 02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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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회가 되면서 사회적으로는 지식과 정보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많은 지식과 정보를 다 소유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새로 생산되는 엄청난 양의 지식과 정보를 개인이 다 얻기란 불가능합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찾아내거나 생산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인재를 뽑는 온갖 시험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을 평가하는 방식에서 업무 수행과 관련된 능력을 평가하는 방식으로 급격히 변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우리 학생들도 지식 평가보다 능력 평가가 강조되는 현실을 이미 체험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변화는 사실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대학 입시에서 오래전에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시행됐던 학력고사-본고사 체제와 현재 시행되는 대학수학능력시험-논술고사 체제를 비교해 봅시다.
학력고사-본고사 체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지식을 측정하는 제도였습니다. 지식이란 우선 이해한 다음 암기해야 자기 것이 되지요. 그래서 학력고사-본고사 체제에서는 교과서의 내용을 암기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예를 들어 ‘제망매가’를 공부한다고 하면, 통째로 외워야 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눈 앞 스크린에 교과서의 제망매가 부분이 선명히 떠올라야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옆에 빨간 볼펜, 파란 볼펜으로 써둔 내용까지 칼라로 떠올라야 했습니다. 만약 그 내용이 희미하게 떠오르거나 잘 안 떠오르면 절대로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은행 저금식’ 교육이 판을 쳤습니다. 마치 은행에 돈을 예금하듯이 지식을 머릿속에 저금해 놓았다가 지불 청구서가 오면 누가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지식을 지불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습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원래 의도보다 좀 퇴색된 측면이 있지만 이와는 전혀 다른 모델입니다. 현재 무엇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보다는 대학에 들어가서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가를 평가합니다. ‘학력’이 지금까지의 학습 성취를 가리키는 과거 지향적 개념이라면 ‘수학능력’은 앞으로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리키는 미래 지향적 개념입니다.
수학능력의 핵심은 바로 문제해결능력입니다. 대학 공부의 본질은 스스로 중요한 문제를 설정하고 이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은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해결능력을 평가하는 데에 주안점을 둡니다.
언어 영역의 경우를 볼까요? 대학수학능력시험 초기에는 교과서에 있는 지문을 거의 출제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등학생이 처음 볼 것 같은 시를 주고는 주제가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어떤 시의 주제를 지금 알고 있는지 보려는 것이 아니라, 시의 주제를 찾으라는 문제가 주어졌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는지를 측정하려는 것입니다. 결국 교과서는 암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일종의 훈련 교범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교과서에 나온 시의 주제를 외울 것이 아니라 시의 주제를 찾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제 제기식’ 교육, 토론식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한 학생이 시의 주제를 ‘통일에 대한 희구’라고 주장하면, 다른 학생이 “그럴 경우 시의 마지막 연은 주제와 전혀 맞지 않아”라고 반론을 제시하고, 여기에 대해 다시 또 다른 학생이 “아니야, 마지막 연을 이렇게 해석하면 그 주제로 모아질 수 있잖아”라고 재반론을 펼치면서 주제 찾는 법을 체득해야 합니다. 결국 교과서를 통해 주제를 찾는 능력을 체득했는지 평가하기 위해 처음 보는 시를 과제로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배운 것을 적용하고 응용하는 능력을 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도 논술과 마찬가지로 통합교과적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부, 기업, 전문대학원에서 인재를 뽑기 위해 시행하고 있는 시험들도 △문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판단능력 △필요한 정보를 찾아내는 검색능력 △찾아낸 정보를 문제 해결에 이용할 수 있는 응용능력 △기존의 정보로는 응용에 한계가 있을 때 그 빈틈을 스스로 메울 수 있는 창의력 등을 주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논술과 궤를 같이 합니다. 그러므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논술을 준비할 때는 눈앞의 결과에만 매달려서 점수 한두 점 더 올리는 데에 급급하지 말고, 사회 전체의 변화와 미래를 고려하여 실제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박정하 성균관대 학부대학 교수·의사소통교육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