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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2월 20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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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제게 주신 이 병고(病苦)를 겸손과 인내로 받아들이나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저를 온전히 맡기옵니다….”
1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내 추기경 집무실. 연한 분홍색 줄무늬 환자복을 입은 김수환(86) 추기경은 소파에 앉아 성서를 읽으며 깊은 묵상에 잠겨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하얀색 영양제를 공급해주는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 소파 앞에는 등받이를 올릴 수 있는 흰색 침대도 놓여 있었다. 》
대담=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3개월째 투병중…“소화기계통 문제 있지만 다른 아픈 곳은 없어”
“李 당선인에게 국민 마음 편안하게 해달라 당부
나라 새로 세운다는 각오-다짐으로 일해 주시길”
한국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이자 한국 사회의 정신적 지주인 김수환 추기경이 병고와 싸우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김 추기경이 노환으로 서울 강남성모병원에 한 달간 입원했다는 소식이 짧게 전해지자 일각에선 ‘중병설’ ‘중태설’ 등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 측의 공식적인 발표가 없어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본보 취재진은 이날 오후 김 추기경 병문안을 위해 집무실을 찾았다. 김 추기경은 지난해 성탄절 전날인 12월 24일 퇴원한 이후 집무실에 머물며 의료진의 왕진 치료를 받고 있다. 김 추기경은 “소화기 계통에 문제가 있어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기력이 많이 떨어졌을 뿐 다른 아픈 곳은 없다”고 말했다. 비서실 측은 “많이 회복되셨지만 날씨도 맑은 날이 있고, 흐린 날이 있는 것처럼 가끔 기복이 있다”고 김 추기경의 건강 상태를 전했다.
이날 본보 취재진이 집무실의 열린 문틈으로 인사를 건네자 김 추기경은 “제가 잘 듣지를 못합니다. 잠시 기다려 주세요”라고 했다. 10여 분 후 비서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에게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수척한 모습, 보청기를 꽂은 한쪽 귀, 기운이 빠져 있는 목소리 등 예전 같지 않은 김 추기경의 모습이 취재진을 안타깝게 했다. 하지만 한 시간 남짓 대화를 나누는 사이 추기경 특유의 시대에 대한 예언자적 통찰, 잔잔한 미소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새봄, 새 정부, 새 희망
“새봄이 됐습니다. 봄은 모든 것이 아름답고 새롭게 피어나는 계절입니다. 계절에 맞춰 우리네 삶도 내적으로 아름답고, 좋은 일이 많이 꽃 피길 바랍니다.”
김 추기경은 퇴원한 뒤인 1월 9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의 예방을 받은 것을 제외하고는 공식적으로 외부 인사와 만나지 않고 있다. 신부와 수녀 등 쾌유를 빌기 위해 찾아온 성직자와 수도자, 의료진의 방문만 허락할 뿐이다. 김 추기경은 “많은 분들이 제 건강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염려해 주신 데 대해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당선 후 추기경을 예방한 이명박 당선인에게 특별히 해 주신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양극화로 갈라진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가 앞장서서 국민이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만 경제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국 60주년을 맞아 대통령 당선인과 정부가 ‘나라를 새로 세운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일해 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개신교 장로가 대통령이 된 데 대해 다른 종교계에서 특정 종교에 대한 편중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 정도는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과 종교인들의 양심의 문제입니다. 잘 조화를 이뤄 나갈 것으로 봅니다.”
김 추기경은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진 요즘도 신문을 꼭 챙겨본다고 했다. 그는 “최근 TV 뉴스 화면을 통해 국보 1호 숭례문이 화재로 붕괴되는 장면도 지켜봤다. 너무도 슬픈 일이었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너무나 통탄할 일입니다. 국보에는 얼마나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까. 우리 사회가 경제적으로 풍요하든, 그렇지 못하든 선조의 얼이 담긴 유산은 내 집 물건보다 더 소중히 간직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문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고 문화적 안목 또한 높아져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게 더 소중
盧대통령 퇴임 뒤에 신앙에서 길을 찾았으면
북녘동포 신앙의 자유 허용되길 간절히 기도”
○고통을 인내와 겸손으로 받아들여야
―요즘 기도와 묵상의 주제는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주어진 현실과 병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의 삶이 겸손하고 가난해야 합니다. 겸손과 인내는 다른 말로 하면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주변에서도 건강에 대한 확신을 가지라고 권유해 주시는 분이 많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추기경께서는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은 이후 57년 동안 성직자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1969년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되고, 민주화 과정에서 많은 역할과 함께 고통도 겪으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올해 건국 60주년을 맞은 감회가 남다를 것 같은데요….
“대한민국 60년을 돌이켜보면 정말 별의별 일이 다 있었습니다. 6·25전쟁처럼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섰던 위험한 때도 있었고 4·19혁명, 5·18민주화운동과 같은 고비들이 있었지요. 보릿고개를 넘기 힘들 만큼 경제가 어려웠는데 지금은 세계 교역 11위의 경제대국이 됐습니다. 대한민국 60년은 이처럼 우리 민족의 힘과 저력을 보여준 시기였습니다. 또한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는 애국가 가사처럼 하느님의 도우심도 컸습니다. 우리 민족은 앞으로 어떠한 난국이 닥쳐도 이 같은 하느님의 보우와 국민의 하나 된 힘으로 능히 이를 이겨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다, 희망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퇴임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도 덕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천주교 영세를 받았는데 성당에 다니지는 않는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제 퇴임하시면 신앙으로 다시 돌아오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나 그보다 더 좋은 길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신앙에서 길을 찾고 위로를 얻었으면 합니다.”
―추기경께서 서울대교구장 시절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면서 북한 선교에 관심이 많으셨는데요.
“북한에 대해서는 제가 늘 기도해 왔듯이 정말로 인간의 기본 권리인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북한 주민들도 자유롭게 하느님을 믿고 살며, 인간 존중과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추기경께선 교황님에게 한국 천주교회에 두 번째 추기경을 보내 달라고 특별히 간청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미래에 대한 추기경의 바람은….
“제가 살아있는 동안 정진석 추기경님의 임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귀한 축복이자 은총이었습니다. 한국 교회가 이제까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 온 것처럼 정 추기경님을 중심으로 시대적 소명을 잘 발전 계승해 나가리라고 믿습니다. 교회와 우리 모두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정리=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