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고전여행]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 입력 2006년 11월 28일 03시 02분


떠도는 여행자, 시마무라. 그는 허무주의자입니다. 뜨거운 열정을 갖고 덤벼드는 여인에게서 허무를 읽고, 순결한 처녀의 모습에서도 허무를 읽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하다’라고 생각하는 거죠. 모든 걸 허무하게 생각하는 사람, 도대체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기차를 타고 이곳 저곳을 들러 풍경을 대하고 풍경 앞에서 겸허를 배우는 그는 조용히 내리는 눈발 같습니다. 눈발 같은 사람, 시마무라. 여러분은 눈발 같은 사내 시마무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허무주의자이며, 눈발 같은 사내 시마무라가 올라탄 기차는 속도가 없습니다. 단지 달릴 뿐입니다. 속도 없이 달리는 기차, 그런 기차는 어떨까요? 여러분, 그 기차에 한번 올라타 보실래요?

소설 ‘설국(雪國)’은 말 그대로 ‘눈의 고장’을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이웃 나라 일본의 작은 시골, 니키타 현(縣)에서 만난 사람들의 아름답거나 혹은 비극적인 사랑이야기입니다. 작가는 196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인데요. 처음 들어보는 친구들이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아름다운 문체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예요. 낯설겠지만 그의 작품은 한번 읽어볼 만합니다. 이제 그 첫 장을 조심스레 넘겨 보겠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섰다.

소설 ‘설국’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때요? 아름답습니까? 이렇게 짧은 세 개의 문장을 보고 무엇이 아름답냐고 의아해하는 친구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되새기면서 읽어 보세요. 그리고 상상해 보세요.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하얗게 펼쳐진 산야를 만나는 순간을요. 아마도 ‘아!’ 하는 경탄이 절로 나올 겁니다.

그런데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상상력의 줄을 마구 마구 뿜어내야 합니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내내 시골 정경은 섬세한 묘사로 이어지니까요. 끊임없이 이야기를 따라 작가가 그려낸 풍경 속으로 빠져 들어가면 그 안에서 자연과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세 명의 인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시마무라, 고마코, 요코입니다.

시마무라는 그저 여행객일 뿐입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리저리 다닐 뿐입니다. 그러다가 게이샤(일본의 기녀로서 연회에서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일을 함) 고마코와 만나 사랑을 하게 되지요. 시마무라와 고마코는 서로 다른 색깔로 사랑을 나눕니다. 시마무라는 하얗게, 고마코는 빨갛게요. 하얀 사랑은, 빨간 사랑은 어떤지 상상해 보세요. 여기서 잠깐 빨간 사랑을 하는 고마코의 열정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을 살펴봅시다.

자신도 모르게 늘 산골짜기의 드넓은 자연을 상대로 고독하게 연습하는 것이 그녀의 습관이었던 탓에, 발목(현악기를 탈 때 쓰는 납작한 물건) 소리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 고독은 애수를 짓밟고 야성의 의지력을 품고 있었다. 다소 소질은 있다 하더라도 복잡한 곡을 악보로 독학해서 악보를 보지 않고서도 자유자재로 켤 수 있게 되기까지는 강한 의지로 노력을 거듭했음에 틀림없다.

고마코는 게이샤로서 갖추어야 할 소질을 스스로 깨쳐 나갔습니다. 일본 현악기 샤마센을 독학해서 익혔으니까요. 고마코가 어떤 사람인지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아마 여러분 중에도 고마코처럼 열정적인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지요. 시마무라는 우연히 마주치게 된 요코라는 처녀에게 은근한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여러분은 삼각관계의 구도를 그리며 그렇고 그런 삼류 연애 소설쯤으로 치부해 버릴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절대로 고전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이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치고 울린 걸까요? 그것은 바로 풍경을 묘사해낸 아름다운 문체와 그 속에 드러나는 인물의 심리 변화가 눈 덮인 세상처럼 고요하게 펼쳐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잊은 듯, 오래 머물렀다. 떠날 수 없어서도, 헤어지기 싫어서도 아닌데, 빈번히 만나러 오는 고마코를 기다리는 것이 어느새 버릇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고마코가 간절히 다가오면 올수록 시마무라는 자신이 과연 살아 있기나 한 건가 하는 가책이 깊어졌다. 이를테면 자신의 쓸쓸함을 지켜보며 그저 가만히 멈춰 서 있는 것뿐이었다.(중략)

시마무라는 쇠 주전자에 귀를 가까이 대고 방울 소리를 들었다. 방울이 울려대는 언저리 저 멀리, 방울 소리만큼 종종걸음 치며 다가오는 고마코의 자그마한 발을 시마무라는 언뜻 보았다. 시마무라는 깜짝 놀라, 마침내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시마무라의 감정 변화를 읽을 수 있나요? 인간의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마치 나무가 계절을 입듯, 아무 것도 없었다가, 초록의 잎을 갖고, 그리고는 빨갛게 물들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찰나겠지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떤가요? 어제의 마음과 오늘의 마음이 늘 같기만 한가요? 그래요, 우리 인간의 감정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시마무라는 그런 사실을 아주 사소한 사물, 혹은 자연을 통해서 깨달아 나갑니다. 소설 ‘설국’은 인간 심리 변화를 이렇듯 아름다운 문체로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그래서 수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거겠지요.

바람이 더욱 차가워진 지금, 거리엔 낙엽비가 흩뿌려지고 있습니다. 이제 곧 눈발이 날릴 테지요. 아주 느리게, 그래서 속도를 느낄 수 없는 열차, ‘설국’에 올라타기 좋은 계절입니다. 주저하지 말고 기차에 올라타세요. 거울 속에 흐르는 저녁 풍경을 음미하며 또 어디론가 떠나가는 시마무라가 보입니다. 차창 안에는 상념에 찬 그가, 차창 밖에는 여러분의 모습이 비치는군요. 아직은 무언가 알 수 없다는, 의문에 찬 표정이 역력합니다. 그래도 용기를 내보세요. 기차가 종착역에 이르면 아직 만나지 못한 요코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요코가 어떤 모습으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나요? 겨울에 떠나는 기차 여행,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랍니다.

이승은 필로소피 논술 전문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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