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法 “改名허가때 개인의사 중시”] '내 이름 내 뜻대로'

  • 입력 2005년 11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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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분(분)○’인 K 씨는 이름 때문에 괴로웠다. 이름을 한자로 쓰면 대부분의 사람이 ‘본O’으로 불렀다. ‘분’을 ‘본’자로 잘못 읽은 것. 호적담당 공무원도 ‘본’으로 잘못 읽어 호적에 이름이 잘못 기록되기도 했다. ‘분O’이라는 이름 자체가 여자 이름과 비슷해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K 씨는 지방법원에 개명 신청을 냈지만 기각됐다. ‘본인의 주관적인 의사’ 외에는 개명을 허가할 만한 사유가 없다는 것이 기각 이유였다.

그러나 K 씨는 개명 허가 기준에 관한 대법원의 새 판례로 개명 허가를 받을 수 있다. 대법원이 “성명권은 헌법상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의 한 내용을 이루므로 (개명 허가 여부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의사’가 중시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기 때문이다.

▽‘내 이름은 나의 것’=법원은 그동안 ‘개인의 주관적인 이유’만을 이유로 내는 개명 신청은 대부분 허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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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명 신청자가 이름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등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때에만 개명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의 개명 허가가 까다로웠던 이유는 ‘사회적인 혼란과 부작용’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김삼순’이라는 이름이 갑자기 ‘김맹순’으로 바뀔 경우 그를 ‘김삼순’으로 알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혼란을 준다는 것이다. 금융 행정상의 불편과 혼란도 고려됐다.

그러나 대법원은 ‘자신의 이름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강조했다. ‘내 이름은 나의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범죄를 은폐하거나 법령의 각종 제한을 회피하려는 불순한 의도 및 목적이 개입되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결정은 ‘이름에 대한 권리’를 헌법상의 권리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의미가 있다. 주심 대법관은 헌법전문가다.

▽개명 신청 ‘홍수’ 예상=지금까지 법원의 개명허가율은 80% 안팎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서 개명이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다. ‘주관적인 의사’만을 이유로 신청하면 기각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특별한 사유’가 없는 사람들은 개명 신청을 꺼렸다.

따라서 이번 결정으로 개명 신청이 크게 늘 것으로 보인다. 2000년(3만3210건)부터 지난해(5만340건)까지 매년 개명 신청 건수는 조금씩 늘었지만 이러한 증가세와는 차원이 다르게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개명 신청자가 “내가 다른 이름으로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불가피한 사유가 없더라도 법원은 개명 신청을 받아들일 것으로 보인다.

▽부작용은 어떻게=개명 신청이 봇물 터지듯 하고 그것이 대부분 받아들여질 경우 부작용도 예상된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 지나친 불안정 및 혼란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미 개명 신청을 판단할 때 악용될 가능성을 미리 막을 수 있는 규칙을 적용해 왔다.

법원의 ‘연령 정정 및 개명 허가 신청 사건의 처리상 유의사항’에 따르면 전과자나 신용불량자 등이 부정한 목적으로 개명 신청을 할 수 없도록 규제하고 있다.

법원은 개명 신청을 한 사람에 대해 경찰을 통한 전과 조회,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를 통한 출입국 사실 조회, 전국은행연합회를 통한 신용정보 조회 등을 해 왔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 改名신청자들의 사연

“사무원이 되는 것이 소원인데 이름 때문에….”

몇 년 전 법원을 찾아 개명 신청을 한 ○공순 씨. 그는 이름 때문에 열등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개명 신청이 늘고 있는 것은 취업 등 사회생활에서 이름을 통해 비치는 개인 이미지 관리, 자기 홍보 등이 갈수록 중요해지는 세태와 무관치 않다.

또 최근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의 극중 주인공 삼순이가 개명 허가를 받아낸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법원이 분류한 14가지의 개명 신청 사유 가운데에는 이처럼 ‘현재의 내 이름으로는 생활하기 창피하고 괴롭다’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름을 발음할 때 저속한 느낌을 주거나 이름 때문에 놀림감이 된다는 경우도 많았다. ‘김방구’ ‘김샌다’ ‘김계란’ ‘이거미’ ‘조철판’ 등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다른 이름을 원했다. 법원 관계자는 “‘음순’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도 개명 신청을 했다”고 밝혔다.

이름을 부르기 힘들거나 잘못 부르기 쉬운 경우에도 사람들은 이름을 바꿔 달라고 호소했다. ‘이률동’ ‘유훤균’ ‘방광휘’ 등의 이름이었다.

대중적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들과 이름이 같다는 이유도 있었고 한글 이름을 한자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한 경우나 한자 이름을 한글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냉대받는 신분을 나타내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노숙자’라는 이름이 그 한 예다.

외국식 이름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꿔 달라고 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이 가운데에는 ‘김소순애’ ‘노병삼랑’ ‘정천대자’ ‘박건차랑’ ‘하에이꼬’ 등 일본식으로 보이는 이름을 가진 50, 60대 중년층이 많았다.

이 밖에 출생신고서에 이름을 잘못 기재한 경우, 실제 쓰는 이름과 일치시키기 위한 경우, 족보상의 항렬자와 일치시키기 위한 경우, 현재의 이름에 선대나 후대의 항렬자가 포함돼 있는 경우, 친족 중에 같은 이름을 쓰는 사람이 있는 경우 등에도 개명 신청이 이뤄졌다.

조수진 기자 jin0619@donga.com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 改名절차 어떻게

개명 신청을 하려면 신청인 본인이 직접 각 법원에 비치된 개명허가 신청서를 작성한 뒤 호적등본(또는 초본)과 주민등록등본(또는 초본) 각각 1부, 인지대 1000원을 첨부해 가정법원(가정법원이 없는 곳은 지방법원 호적과)에 제출해야 한다.

필수는 아니지만 친구나 동료 등에게 개명신청과 관련된 사실의 확인을 받은 인우보증서와 보증인의 주민등록등본을 소명자료로 제출하면 법원의 판단에 도움이 된다.

호적과 실제 사용하는 이름이 다르다면 통장사본이나 명함, 재직증명서 등을 첨부서류로 제출하면 된다.

개명심사는 서류심사가 원칙이다. 법원은 성인의 경우 신원조회에 소요되는 시간까지 포함해 30∼45일 내에 개명 허가 여부를 판단한다. 미성년자는 보통 15∼30일 소요된다.

법원에서 개명 허가를 받으면 허가서를 받은 날로부터 30일 안에 주소지 구청이나 읍면동사무소에 개명 신고를 하고 호적을 변경한다. 면허증 자격증 예금통장 등은 새 주민등록등·초본을 발급받은 뒤 이름 변경신청을 하면 된다.

개명 신청이 기각됐다면 결정 뒤 1개월 이내 항고장을 작성해 신청 법원에 다시 제출하거나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다시 신청할 수 있다.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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