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아서… 위험해서… ‘봉사 확인증’ 돈주고 산다

  • 입력 2005년 1월 18일 18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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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일정 시간 이상 하도록 의무화된 봉사활동을 편법으로 이행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최소 의무봉사활동 시간은 학년당 20시간씩 60시간. 그러나 일부 대학의 봉사활동 특별전형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100시간 이상을 채워야 한다. 이 때문에 봉사활동 경력을 돈을 주고 사거나 각종 편법으로 인정받는 일부 학생이 있는 것으로 본보 취재 결과 확인됐다.》

가장 흔하게 봉사활동 확인증을 얻는 방법은 평소 알고 지내는 공익근무요원이나 환경미화원에게 부탁해 봉사활동 시간을 몇 배로 늘리는 것.

또 학부모가 담배 몇 보루 값을 공익근무요원이나 환경미화원에게 주고 하지도 않은 자녀의 봉사활동 확인서를 받아가기도 한다.

인천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일하는 김모 씨(22)는 “교회 신도들의 부탁을 받은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백지 확인증에 도장만 찍어 대량으로 발급해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서울의 일부 학교에서 직접 시행하고 있는 봉사활동 방식도 허술하기 짝이 없다.

‘자기 이웃 가스 점검하기’의 경우 주민들이 학생들에게 안전점검 받기를 꺼려 별 실효가 없다. 이 때문에 학생들은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안전검사를 받았다는 확인도장만 8개 받아 8시간의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도 한다.

직접 저금통을 들고 학급을 돌며 동전을 모으면 봉사활동 2시간을 인정해 주는 ‘사랑의 동전 모으기’도 자신이 돈을 내더라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있으나 마나한 프로그램이다.

또 ‘기아 24시간 체험’ 역시 하루를 굶으면서 아낀 음식값을 모으면 봉사활동 8시간을 인정해 준다는 취지지만 감시하는 사람이 없어 실제 굶지 않은 채 돈만 내는 경우도 있다.

방학 동안 운영되는 일부 입시 기숙학원에서는 학생들한테 걷은 돈을 후원금으로 낸 뒤 보육원 등에서 봉사활동 확인서를 대신 받아주기도 한다. 학생 유치를 위해서라는 설명.

이처럼 봉사활동이 유명무실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현행 입시제도와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 일선 교사나 자원봉사센터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인문계 고교생의 다수가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학원공부나 과외 등으로 바쁜데 1년에 20시간의 내실 있는 봉사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봉사활동 특별전형을 지원하려는 학생들의 경우도 내신에 신경을 써야 하기 때문에 공부시간을 아껴 봉사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학교를 사랑하는 모임’의 김형진 사무국장은 “특별전형을 위해서는 적어도 고교 2학년 때까지 100시간 이상 자원봉사를 해야 하는데 이는 매주 자원봉사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며 “이 때문에 돈을 주고 봉사활동 경력을 사려는 경우도 생겨난다”고 말했다.

서울 A고교의 한 교사는 “학생이나 학부모가 장애인이나 독거노인 돕기 같은 의미 있는 일은 어렵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피하는 경향도 있다”고 말했다.

또 방학 때 학생들이 집중적으로 몰리기 때문에 사회복지기관이나 각 공공기관이 학생들에게 시킬 일이 없게 되는 구조적 문제도 안고 있다.

서울 서초구 자원봉사센터 정희선 소장(42)은 “학생들이 원하는 때와 장소, 공공기관이나 사회복지단체가 필요로 하는 인력을 파악해 연결해 주는 전산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기재 내용 90%가 가짜 대입걸려 알고도 모른척”▼

“학생부에 기록된 봉사활동의 80∼90%가 허울뿐인 내용입니다.”

13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 강원지역의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해 온 서울 A고교 최모 교사(47)는 학생들의 봉사활동이 본래의 취지와는 크게 벗어나 안타깝다며 이같이 말했다.

최 교사가 봉사활동을 시작한 것은 심장병에 걸린 딸을 잃고 딸에게 못 다한 사랑을 주기 위해 이 보육원을 찾은 1992년부터.

그러던 중 1996년 자원봉사활동이 대학입시에 반영될 것이라는 정책이 발표되자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단체로 최 교사가 찾던 보육원으로 몰려가 기부금을 내는 방식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봉사활동 담당 전임교사가 된 그는 대입의 한 방편으로 전락한 봉사활동 제도를 보며 항상 씁쓸했다.

최 교사는 “일부 학생은 보육원에 다녀오지도 않고 2, 3일 이상 봉사활동을 했다며 확인증을 끊어 오기도 한다”며 “대입 때문에 알고도 모른 척해야 하는 현실이 괴롭다”고 토로했다.

최 교사는 봉사활동을 대입 전형의 수단으로 전락시킨 교육제도를 꼬집었다.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부족하고 장소도 한정돼 있어 부족한 내신성적을 봉사활동으로 만회하려는 학생들은 거짓으로 봉사활동 확인증을 가져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학생들에게 부담이 가지 않도록 봉사활동 시간을 현실화하고 자원봉사센터와 학교가 철저하게 학생들의 봉사활동 상황을 관리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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