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재교육]세살 영재 여든까지 간다?

  • 입력 2005년 1월 10일 17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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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교육전문가들은 영재성은 타고나지만 환경에 의해 더 계발되거나 사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교나 교육청에 영재교육 전문인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박영대 기자
영재교육전문가들은 영재성은 타고나지만 환경에 의해 더 계발되거나 사장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학교나 교육청에 영재교육 전문인력이 부족한 실정이다. 박영대 기자
“우리 아이가 혹시 영재는 아닐까?”

부모라면 누구나 어린 자녀의 깜찍한 행동에 한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다. 나이가 들면서 기대 수준이 점점 떨어져 실망감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자녀를 영재로 만들고 싶어 하는 부모의 욕망은 식을 줄 모른다.

그러나 국내에서 영재성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란 극단적 표현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영재교육 환경이 열악해 ‘영재’라는 화려한 단어 뒤에 감춰진 인생역정은 순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 추락하는 영재들… 영재 절반이 평범한 인생

2003년 한국교육개발원이 1980년 전후로 태어난 영재 81명의 대학진학 결과를 추적한 적이 있다. 절반 이상이 그저 ‘평범한’ 인생을 살거나 상식적인 기대 수준에 못 미친 경우였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포항공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 등 최상위권 진학자는 16명(19.8%)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중위권 이하의 대학에 진학했다. 고교만 마치고 취업했거나 대입 재수생 등도 10명(12.4%)이었다.

어릴 때부터 한 번 들은 말 글 노래 등을 모두 기억해 내 3세 무렵 영재 판정을 받은 A 씨(24)는 현재 전문대를 중퇴하고 대입 준비를 하고 있다.

A 씨 어머니는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다 알고 있어 수업을 거의 듣지 않았다”며 “초등학교 입학 후부터 학교 공부에 흥미를 잃었지만 사는 게 바빠 이를 바로잡아 주지 못한 까닭에 학년이 올라가도 성적은 늘 하위권을 맴돌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금 우리 아이는 평균 이하가 됐다. 뛰어난 기억력이 되레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게 만들었다”며 씁쓸해했다.

B 씨(23)는 실업계 고교를 졸업한 후 전문대에 진학했다가 재수한 뒤 서울 G 대에 다니고 있다. 스스로 한글과 숫자를 깨치고 초등학교 입학 전 10자리 이상 되는 숫자의 덧셈 뺄셈, 한자, 바둑 두기 등을 척척 해냈다. 서울대에서 영재교육을 받기도 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1년 만에 그만뒀다.

몸이 약했던 B 씨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업고 인천에서 서울까지 전철을 타고 교육을 받으러 다녔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져 결국 중간에 포기했다.

B 씨의 아버지도 “아이가 머리만 믿고 공부를 안 했지만 잘하려니 하고 놔둔 게 문제였다”며 “제대로 영재 지도를 했으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 길러진 영재가 아닌 숨은 영재 발굴해야

2002년 ‘영재교육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정부가 영재교육에 관심을 쏟고 있지만 체계성이 없어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다.

교육인적자원부가 획일적인 평준화제도의 보완과 수월성(秀越性) 교육을 위해 영재교육 대상자를 2010년까지 현재 0.3% 수준에서 1%까지 늘릴 계획이다.

현재 영재교육은 시도교육청이 주관하는 영재교육원, 영재학급은 물론 과학기술부의 후원을 받는 대학 부설 과학영재교육원은 영재교육을 ‘방과 후 프로그램’ 또는 방학 때 운영하고 있다.

한국교육개발원 조석희(趙夕姬) 영재교육실장은 “영재성은 타고나지만 환경에 의해 더 계발되거나 사장될 수 있다”며 “정규수업이 아니어서 학교나 교육청에 영재교육 전담자가 없고 전문성 체계성도 부족하다”고 말했다.

서울시교육청의 한 관계자는 “영재교육 대상과 영역을 확대해야 하지만 현재 전담교사, 판별도구 등 기초 준비가 안돼 있다”고 말했다.

같은 분야의 영재를 선발하고 가르치더라도 기관에 따라 선발방식, 과목, 교육 내용도 제각각이고 연결성도 없다.

서울대 과학영재교육원 조한혁(趙漢爀·수학교육) 교수는 “‘정보영재’라도 대학에 따라 다루는 내용이 홈페이지 제작, 컴퓨터 프로그래밍, 논리 등으로 천차만별”이라며 “초등학교 때 선발된 영재가 중등 과정에서 어떻게 교육받는지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서울대의 한 교수는 “‘길러진’ 영재가 아니라 ‘숨은 영재’를 발굴해 교육해야 한다”며 “단기시험이 아니라 수개월에 걸친 단계별 선발이나 면접을 강화해야 하지만 예산 문제와 객관성 시비로 쉽지 않은 실정”이라고 말했다.

○ 선행학습이 영재교육? 착각하지 말라

공교육이 영재교육을 제대로 담당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사설 영재원들이 영유아와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성업 중이다.

그러나 국내 사교육 영재교육 기관 가운데 영재교육 기관으로 정식 인정받은 곳은 없다. 영재교육은 시도교육감이 승인하는 기관만 할 수 있다.

사설 영재원은 △창의력 사고력 등 영재성 계발을 돕는 영재원 △간판은 영재원이지만 수학 선행학습 학원 △공교육 진학 준비과정 등 세 가지가 있다.

교육비가 월 30만 원 이상이지만 수요가 더 많다. 서울 K 연구소는 1주일에 한 번 3시간 기준으로 24만 원이고 수학 과학에 역점을 두고 있다. 또 모 영재교육원도 30개월 이상 아동을 대상으로 주1회 4시간 기준으로 30만 원 안팎을 받고 있다.

배우는 내용이 일반 유치원보다 높기는 하지만 영재교육이라기보다는 선행학습 쪽에 가깝다는 지적도 많다.

유아나 저학년 중심의 영재교육은 교육 효과는 물론 판별 논란도 있다. 영재교육 기관이 인지능력검사(IQ)로 영재 여부를 판별하지만 신뢰성이 문제다. 어릴수록 IQ검사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연구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교육청도 “초등 3학년 이전에는 영재 판별도구를 만들기 어렵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양대 류지영 강사(영재교육 박사)는 “영재교육은 빠를수록 좋기 때문에 미국도 다양한 유아영재 판별법과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부모 이모 씨(37·서울 서초구 방배동)는 “영재원을 다닌다는 것 자체로 영재로 인정 받은 것이어서 기분이 좋다”며 “어려서부터 사고력 훈련 덕분인지 초등학교에서도 보고서 작성이나 발표가 논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고려대 김성일(金聖鎰·교육학) 교수는 “영재교육은 다양한 재능을 육성하기 위한 것인데 국내에서는 엘리트 교육과 혼동한다”고 지적했다.

이나연 기자 larosa@donga.com

손효림 기자 arys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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