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첩산중’ 강원 인제군 진동리 老부부의 신년맞이

  • 입력 2005년 1월 2일 18시 10분


코멘트
새해 첫날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 설피밭마을에 사는 이경준 할아버지가 땔감을 해 오고 있다. 인제=김미옥 기자
새해 첫날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 설피밭마을에 사는 이경준 할아버지가 땔감을 해 오고 있다. 인제=김미옥 기자
《을유년 새해를 하루 앞둔 지난해 12월 31일 오후, 오지 마을의 겨울나기 준비를 엿보기 위해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2리 설피밭 마을을 찾아 나섰다. 2, 3년 전 만들어진 지도에는 아예 길이 그려져 있지 않을 만큼 오지 중의 오지. 최근 새 길이 놓인 뒤에도 장을 보려면 30분쯤 차를 타고 나가야 할 정도로 산속에 자리하고 있다. 읍내인 현리를 지나 10km 정도 비포장도로를 달려 들어가다 보면 웅장한 백두대간의 산세가 길 양옆으로 펼쳐진다.》

이 마을은 진동계곡의 최상류 지역으로 해발 700m. 눈이 많이 와서 ‘설피’(눈이 깊은 곳을 다닐 때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칡넝쿨이나 노로 넓적하게 만들어 신의 바닥에 대는 물건) 없이는 다닐 수 없다고 해서 마을 이름도 설피밭이다.

눈이 쌓인 길가에서 까만 돼지 두 마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낯선 손님을 맞았다. 주민 이상우 씨(65)는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깔린 것도 불과 십여 년 사이에 생긴 일”이라며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말이 실감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마을 초입 진흑동에 사는 이경준 할아버지(83) 집에 들렀다.

“6·25전쟁 이전에는 300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었어. 그때는 정월 이튿날부터 이집 저집 다니며 마을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했어. 그렇게 점심 저녁 먹다보면 보름이 훌쩍 지났지.”

현재 30가구 정도가 거주하는 이곳에서 50년 넘게 살아왔다는 할아버지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은 지 100년이 넘는, 방 두 칸짜리 집은 겨우내 할아버지가 지게로 져 나른 나무를 땐다. 부인 박옥희 할머니(71)는 “장작 한 짐으로 종일 불을 때면 조금 남는다”고 말했다. 매서운 바람이 방문 틈으로 밀려들었지만 아랫목은 뜨끈뜨끈했다.

할머니는 방 한구석에 메주 여덟 덩이를 매달아뒀다. “동짓날 만든 거여. 설 쇠고 장 담그려고 그랴.”

진동리 인근은 11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눈에 파묻혀 있을 때가 많다. 올해는 눈이 뜸했다고 하지만 겨울산은 흰눈을 잔뜩 이고 있었다.

깊은 산속이라 미리 겨울나기를 위한 준비를 해두는 게 이 마을 사람들에겐 큰일이다. 집집마다 장작을 넉넉하게 쟁여 놓는 것은 물론 옥수수나 감자 같은 비상식량도 자루째 쌓아두었다.

주민 마복순 씨(51·여)는 “여기서는 겨울 지낼 준비를 완벽하게 해놓지 않으면 얼어 죽는다”며 웃었다. “눈이 많이 올 때는 한번에 1m가 넘게 쌓여요. 겨울이면 늘 쌀이나 반찬거리, 감기약 소화제 등 비상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조명호 씨(45)는 “겨울에 영하 10도∼영하 20도쯤은 보통이라 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다른 사람과 연락이 안 되면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새해 1월 1일 오전 6시. 박 할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어나 부엌의 전구를 밝히고 황소 두 마리의 여물을 준비하는 것으로 새해 첫날을 시작했다.

“새해라고 다를 게 있나. 똑같이 열심히 사는 거지.”

인제=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시내버스 운행 첫날 동네잔치▼

“무사운행” 告祀
새해 첫날 설피밭마을에 처음 들어선 버스 앞에서 동네 주민들이 무사운행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있다.인제=김미옥 기자

새해 첫날 오전 6시. 진동2리 설피밭마을의 농부 김철한 씨(43)는 두 딸을 깨워 아내와 함께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아직 새벽달이 떠있는 시간, 영하 19도의 매운 추위에도 주민 30여 명이 회관에 모인 것은 읍내인 현리와 이곳을 오가는 시내버스가 이날 첫 운행을 시작하는 까닭이다.

현리에 있는 중학교로 통학하는 학생이 기존 1명에서 새해에 4명으로 늘어 아침저녁 두 차례 시내버스가 다니게 된 것이다.

현리에서 오전 6시 15분 출발한 대한교통 소속 버스가 25분 만에 마을로 들어섰다.

주민들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라며 환한 얼굴로 덕담을 나눈 뒤 무사고를 기원하는 작은 고사를 지냈다. 버스가 싣고 온 시루떡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빙긋 웃는 돼지머리에는 만 원짜리 지폐가 꽂혔다.

한편에서는 기린초등학교 진동분교 전교생 9명이 장구와 북, 꽹과리를 울렸다.

버스운전사 신영길 씨(42)와 마을주민들은 마을회관에서 떡국을 나눠 먹은 뒤 몇몇 주민의 ‘즉석 제안’으로 함께 시승식에 나섰다.

1km 아래 억새밭을 돌아 다시 마을회관으로 돌아오니 새해의 첫 해가 둥실 떠올라 마을을 비추고 있었다.

인제=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