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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4년 11월 23일 18시 1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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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백발의 노신사가 연단에 올랐다.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저는 힘든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저의 이상을 꺾을 수는 없습니다.”
알렉산드르 둡체크(1921∼1992)였다. 1968년 ‘프라하의 봄’의 주역이었던 그가 21년 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험난한 정치역정을 걸어 온 노(老)정치인은 감격에 겨워 눈시울을 붉혔고 군중도 그와 함께 울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유럽의 강국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48년 공산당이 집권하면서 사정은 변했다. 자유는 억압됐고 경제는 피폐했다.
1968년 초 공산당은 강경파를 퇴진시키고 온건파 둡체크를 당 제1서기로 내세워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려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 의지는 공산당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언론검열이 폐지되고 집회결사의 자유가 확대됐다. 그의 개혁 노선은 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을 뒤덮은 변화의 열망과 맞물려 대대적인 자유화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소련의 탱크가 몰려왔다. ‘프라하의 봄’은 8개월 만에 끝나고 당서기직에서 쫓겨난 둡체크는 20년 넘게 산림노동자로 전전했다.
80년대 말 동유럽 민주화의 거센 파도 속에서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20여년 전 선구적이었던 그의 이념은 자본주의가 몰아치는 시대의 변화 속에 퇴색한 ‘유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89년 공산당 몰락 후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바츨라프 하벨에게 고배를 마셨다.
체코슬로바키아를 강타한 민족주의 물결은 그에게 또 다른 좌절을 안겨 주었다. 그는 국가 통합을 위해 연방이 유지돼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체코슬로바키아는 93년 1월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쪼개졌다. 둡체크는 연방 분리를 40여일 앞두고 불의의 교통사고로 눈을 감았다. 이 ‘실패한 이상주의자’의 마지막 희망도 시신과 함께 묻혀버렸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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