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법-수경스님 ‘생명평화탁발순례’ 동행 취재기

  • 입력 2004년 4월 15일 18시 29분


14일 오전 10시반 전남 곡성군에서 전북 남원시로 이어지는 24번 국도. 길 한편으로 10여명이 일렬로 걷고 있었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스치듯 달려 가며 흙먼지를 날렸지만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길을 재촉했다. 이들은 도법(道法), 수경(修耕) 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었다.

3월 1일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한 이 순례단은 45일간 구례 하동 산청 함양군, 남원시 등 5개 시군의 1500리 길을 돌아 지리산 일대 순례의 마지막 코스인 남원시 만인의총(萬人義塚)으로 향하던 길이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남원시내 만복사지(사적 349호)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메뉴는 남원 불교신자 모임인 화엄회가 준비한 비빔밥. 그동안 굳은 김밥이나 누룽지로 한 끼를 때운 데 비하면 오랜만에 제대로 먹어 보는 식사였다. 지난해 삼보일배(三步一拜)를 하다가 다친 무릎 때문에 아직까지 다리를 절룩이는 수경 스님은 “삼보일배가 전투였다면 이건 소풍이나 다름없다”며 껄껄 웃었다.

식사 후 그들은 만복사지에 모인 시민들과 대화를 나눴다.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도 나왔다.

“자만(自慢)이 정치를 망칩니다. 내 숫자가 많다고, 인기가 높다고 상대를 무시하면 꼭 화를 입습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공동선을 위해 함께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섬진강변 둑길을 걷는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순례단은 가능하다면 쭉 뻗은 아스팔트길보다 좀 돌아가더라도 흙길을 찾아 걷는다. -사진제공 생명평화탁발순례단

지금까지 구간별로 순례에 참가한 사람은 500여명. 순례단이 개별 접촉 또는 대중 모임 등을 통해 만난 사람은 1500여명에 이른다. 5개 시군의 시장 군수와 읍면장들도 만났다. 교회, 성당, 원불교 교당 등에서도 잠자리를 했다. 도법 스님에게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물어보았다.

“우리에게 밥과 잠자리를 준 사람들은 아름다웠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는 “소문에 아주 아프다고 들었던 병자(농촌)를 실제 만나 보니 빈사 상태였다”며 비유로 말했다. 초등학생이 한두명밖에 없는 면(面)이 수두룩했고 대부분의 마을에서 50대 중반이면 가장 젊은 축에 들었다.

“다른 거면 몰라도 농업만큼은 경쟁의 잣대로만 잴 수는 없습니다. 생명의 보금자리인 농촌은 근본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순례단은 길을 걸으면서 처음 가졌던 희망의 싹을 찾았을까. 생명과 평화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이들은 무모해 보이는 이 꿈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대안이 될 거라고 믿고 있다.

순례단 총괄진행을 맡은 이원규 시인은 “걸으며 자신을 만나고 쉬면서 사람을 만난다는 탁발 순례의 취지가 비교적 순조롭게 이뤄졌다”며 “앞으로 3년 동안 보다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들은 ‘길 위의 길’을 걷는다. 14일 지리산 순례를 마친 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이어 22일부터 제주도에서 다시 순례를 시작한다. 도법 스님은 말한다.

“희망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겁니다.”

남원=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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