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99년 영화 ‘쉬리’ 관객 200만명 돌파

  • 입력 2004년 4월 9일 18시 51분


“쉬리야! 반갑다.”

1999년 한국경제가 파산했을 때, 충무로를 기웃거리던 대기업 자금이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을 그 무렵에, 토종 관상어 쉬리의 출현은 한국영화계의 축복이었다. 구원이었다.

쉬리의 속명(屬名)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그해 4월 ‘쉬리’는 국내 영화사상 처음으로 관객 200만명(서울 기준)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 즈음 영화는 때 아닌 ‘햇볕정책’ 논쟁에 휘말린다.

김대중 정부는 이 영화가 “햇볕정책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치켜세웠고, 야당은 “물러터진 DJ의 대북정책에 대한 신랄한 야유”라고 꼬집었다.

북한은 대남방송을 통해 “한반도의 화해분위기를 흐리는 반북(反北)영화”라고 발끈했다. 일부 영화인들도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30대의 젊은 감독이 이렇듯 냉전적 사고에 젖어있다니….”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쉬리’는 한국영화에서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며 “간첩은 더 이상 난폭한 어릿광대가 아니었다”라고 썼다.

이 영화가 용공이냐, 반공이냐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강제규 감독이 스스로 밝혔듯이 영화는 단지 (북한 공작원인) 이방희나 박무영이 ‘자기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그렸을 뿐이다.

‘쉬리’의 이데올로기는 좌도 우도 아니다. 우리의 현실 그 자체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 이해, 화해가 남북관계의 정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단에 따른 정치, 군사적 대치는 말로는 성취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설정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햇볕정책이 없었다면 이 영화는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영화에서 ‘무장공비’나 ‘무장간첩’을 특수부대원 또는 테러리스트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지정학적(地政學的) 사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영화가 냉전적으로 비친다면 분단에 ‘베인’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가파르기 때문이 아닐까.

남북 정상이 한자리에 앉아 축구경기를 지켜본다? 이에 분노한 박무영이 내뱉던 대사가 떠오른다. “니놈들은 반드시 이 ‘흥청망청’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남쪽에서나 북쪽에서나 ‘리얼’한 오늘의 현실이다.

이기우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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