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희 교수 기고문 전문

  • 입력 2004년 3월 20일 11시 27분


의자에 앉아 꿈을 꾸는 한 여인. ‘장미의 정령’으로 분장한 발레리노. 무대는 몽환적이었다. 관객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 순간, 어두컴컴한 객석 위로 하얀 조각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주 특이한 소품이었다. ‘쿵’ 하는 소리는 음향 효과로 들렸다.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었기에 의도적인 연출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객석 앞쪽이 어수선해졌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불이야” 소리쳤다. 극장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공연이 아니고 실제 상황이었다. 객석에 불이 들어오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극장 천장에서 석고 보드 조각들이 떨어져 객석에 앉아 있던 초등학생의 머리를 친 것이다. 다친 아이는 어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황급히 극장을 빠져나갔다.

공연 관계자가 관객들에게 빨리 대피하라고 소리쳤다. 나머지 프로그램은 모두 취소됐다. 18일 밤, 다른 데도 아니고 이 나라 문화예술 정책의 산실인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에서, 현대춤 공연 때 벌어진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극장 관계자에 의하면, 개관한 지 25년이 되었지만 그동안 안전 진단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5년 전부터 끊임없이 안전 진단과 보수 공사를 건의했지만, 번번이 무시되었다고 한다.

정치와 경제, 사회 전반이 돈과 권력을 좇으며 정신없이 돌아가도, 우리에게는 현실 논리에 의해 훼손되지 않는 예술이 있다고 믿어왔다. 그런데 문예진흥원 예술극장의 ‘하늘이 무너졌다’. 그날 밤, 나는 공연예술계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안타까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이렇게 총체적으로 부실한 나라에서 나는 예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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