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복수정답 인정]다른 문제도 논란… 大入혼란 우려

  • 입력 2003년 11월 24일 18시 55분


이종승 교육평가원장(오른쪽)과 배두본 수능 출제위원장은 24일 복수 정답을 인정한 뒤 고개를 숙인 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안철민기자
이종승 교육평가원장(오른쪽)과 배두본 수능 출제위원장은 24일 복수 정답을 인정한 뒤 고개를 숙인 채 서울 종로구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갔다. -안철민기자
시중 문제지와 유사한 지문 출제 논란, 학원 강의 경력 출제위원 선정 논란에 이어 사상 초유의 복수 정답 인정 사태로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공신력은 땅에 떨어졌다.

일부 수험생들이 사회탐구 과학탐구 등에서 오답 및 복수 정답 시비를 잇달아 제기하며 법적 소송도 불사할 태세여서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가운데 수능 시스템에 대한 비판도 높아가고 있다.

▽소송 잇따를 듯=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언어영역 17번 문제 외의 다른 오답시비 문제는 재검토 결과 정답에 이상이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고 밝혔으나 사회탐구와 과학탐구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온 수험생들이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며 소송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평가원이 복수 정답을 인정한 언어영역 문제에서 원래 정답을 쓴 수험생들도 법적 소송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평가원은 지난해 수능에서도 원점수를 공개하지 않아 소송을 당하는 등 수능을 둘러싼 소송 사태가 일반화되는 사태를 스스로 초래했다는 비판도 있다.

▽대입 일정에 차질은 없나=이종승 평가원장은 “수능 채점이 마무리 단계에 있기 때문에 12월 2일 수험생에게 성적을 통지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복수 정답 인정으로 상대적인 피해를 보게 된 수험생들이 법적 대응에 나서고 다른 영역 오답시비 문제에 대한 정답 재검토 요구가 봇물처럼 터지면 채점과 성적처리가 늦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최악의 경우 12월 2일 성적통지는 물론 같은 달 16일부터 내년 2월까지 계속되는 대학입시 정시모집 군별 전형 역시 연기될 수밖에 없어 올해 정시모집이 큰 혼란에 빠질 우려도 있다.

▽출제과정 문제없나=짧은 시간에 출제위원을 선정해 약 한 달간 합숙하는 현행 수능 출제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출제위원 선정 기간이 일주일밖에 되지 않아 출제위원 개개인에 대한 면밀한 검토작업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또 영역별 출제팀장이 출제위원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학연과 인맥이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서울 K대 H교수는 “수능 출제위원들이 특정 학맥을 중심으로 서로를 추천하며 출제위원 경력을 이용해 문제집이나 참고서를 집필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서울 화곡고 이석록 국어교사는 “언어영역은 정답 시비가 나올 가능성이 가장 큰 분야”라며 “단기간 합숙하며 문제를 출제하는 전근대적인 출제방식을 고치지 않으면 유사한 논란이 계속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평가원이 이날 신뢰도 추락을 무릅쓰고 복수 정답을 인정한 것은 검토위원마저 의견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기존의 정답을 고집하다가는 집단 소송 등 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는 분석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서울 Y고 교감은 “매년 수능과 관련한 논란이 있었지만 올해처럼 심각했던 적은 없었다”면서 “출제위원 선정과정에서부터 평가원이 안일하고 미숙하게 처리해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정답 시비 문제들▼

복수 정답이 인정된 언어영역 짝수형 17번 문제는 시인 백석의 시 ‘고향’에 나오는 ‘의원(醫員)’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것을 그리스신화 ‘미노토르의 미궁’ 지문에서 고르는 문제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시 ‘고향’에서 시인이 ‘의원’을 매개체로 고향을 떠올리고 있으므로 ‘미노토르의 미궁’에서는 그리스 영웅 테세우스를 ‘비밀의 방’으로 연결해주는 매개체인 ‘미궁의 문’이 정답이라는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비밀의 방’에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이 있기 때문에 테세우스가 비밀의 방에서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며 이를 가능하게 해 주는 매개체인 ‘실’이 정답이라는 주장이 제기됐으며 결국 평가원은 이를 인정하게 됐다.

이 문제 이외에도 사회탐구 인문계 67번과 예체능계 71번, 과학탐구 화학Ⅱ 67번 문제 등에서 오답 및 복수정답 시비가 일고 있다.

사탐 67번(홀수형)은 지문을 주고 ‘다음 자료에서 추론할 수 있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의 모습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을 고르는 문제.

평가원은 ‘②종법적 가족제도의 정착으로 민촌이 반촌으로 변하였다’를 정답으로 제시했지만 일부 수험생은 ‘④사족들은 족보와 종계를 기본으로 향촌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다’는 보기도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평가원은 “지문을 통해 답을 고르라고 했기 때문에 정답은 ②번”이라는 입장이다.

사탐 71번은 춘향전과 호랑이 민화를 제시한 뒤 이들 작품이 나온 시대상에 대한 틀린 서술을 고르는 문제. 평가원은 ‘②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가사문학이 발달했다’를 정답으로 제시했지만 ‘①한글소설을 바탕으로 한 판소리가 유행하였다’도 틀린 서술이라고 일부에서 주장하고 있다. 판소리계 소설은 설화→판소리→소설로 발전했지 소설에서 판소리로 발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과탐 자연계 화학Ⅱ 67번은 HCHO, BH₃, H₂O, NH₃ 등 4가지의 루이스전자식을 제시하고 옳은 보기를 고르는 문제다. 평가원은 ④번을 정답으로 제시했지만 일부 수험생은 BH₃의 경우 평면삼각형 구조를 갖고 있는지가 명확히 증명되지 않아 ②번도 맞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과학 교사는 “고교 수업에서 가르치는 내용대로라면 평가원에서 제시한 정답이 맞지만 엄밀히 따지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평가원은 이들 4문제의 오답 및 복수 정답 여부를 집중 검토했으나 언어영역 문제에 대해서만 복수 정답을 인정했다.홍성철기자 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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