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운전사의 ‘진실 찾기’…“가해자서 피해자로”

  • 입력 2003년 3월 23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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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트럭운전사가 부장검사 출신의 변호사가 몰던 외제승용차와 부딪친 접촉사고 때문에 ‘가해자’로 몰려 유죄판결이 확정됐다가 민사재판에서 거꾸로 ‘피해자’로 인정된 사실이 23일 뒤늦게 밝혀졌다. 형사재판의 결과가 민사재판에서 정반대로 뒤집히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서울지법 민사22단독 김무겸(金武謙) 판사는 지난달 17일 “사고 피해자인 변호사 A씨에게 지불한 자동차 수리비 28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S보험사가 원경원씨(69·트럭운전사·사진)를 상대로 낸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원씨의 과실이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김 판사는 “수사기록상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유력한 증거인 A씨와 목격자 김모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는 데다 사고현장의 교통량과 차량진행 방향 등을 고려할 때 원씨의 과실로 사고가 났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사건 전말=트럭운전사 원씨는 2001년 3월 5일 오후 4시반경 화물을 싣고 경기 의정부시 금신교차로(일명 녹양사거리)를 지나다 오른쪽에서 오던 A변호사가 운전하는 벤츠 승용차와 충돌했다.

45년 운전경력의 원씨는 상대 차가 자신의 차 오른쪽 뒤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상대방의 과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원씨의 주장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찰은 부장검사를 역임한 뒤 의정부시에서 활동 중인 A변호사의 주장을 기초로 원씨가 신호를 위반해 사고를 낸 것으로 조서를 작성했다. 원씨는 검찰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검찰 역시 원씨의 주장을 일축하고 원씨를 교통사고처리특례법 및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서울지법 의정부지원은 지난해 6월 A변호사 등의 진술을 근거로 원씨에게 금고 6월에 집행유예 2년의 ‘유죄’ 선고를 내렸다. 당시 원씨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고 대서소 법무사 등의 도움을 받아 혼자 소송을 진행했다.

▽진실 찾기=암 투병 중이던 원씨의 부인은 남편의 ‘유죄’ 선고 이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다가 5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원씨는 법무사의 잘못된 조언으로 항소의 기회마저 놓쳐버렸다.

원씨의 유죄가 확정되자 A변호사에게 ‘벤츠’ 수리비 2800여만원을 지급한 S보험사는 이를 근거로 원씨에게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요구했다.

원씨는 자신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뒤늦게 목격자를 찾아나서는 등 안간힘을 썼고 소송을 도와줄 변호사도 찾았다. 소송을 대리한 이찬희(李讚熙) 변호사도 왕복 4시간 거리의 현장까지 6차례나 다녀오는 등 원씨의 억울함을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재판부 역시 현장검증을 거친 뒤 과학적으로 판단한 끝에 결국 원씨의 손을 들어줬다.

직진과 좌회전 신호가 동시에 떨어지는 사거리에서 원씨가 신호를 위반하고 운행하다 오른쪽에서 직진하던 차와 충돌했다면 원씨는 충돌에 앞서 신호를 위반해 가며 수십 대의 좌회전 차를 뚫고 나와야만 가능한 것으로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

이 변호사는 “판결이 확정되는 대로 민사재판 결과를 근거로 형사재판을 바로잡기 위해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길진균기자 l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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