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대구지하철 참사 시민애도의 날'

  • 입력 2003년 2월 23일 15시 58분


"보고싶다. 행복해라."

'대구지하철 참사 시민애도의 날'인 23일 사고 장소인 중앙로역 주변에는 아침부터 시민들의 추모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간간히 비를 뿌리는 궂은 날씨만큼 시민들의 표정은 무거워보였다.

중앙로역 아카데미 극장 앞 광장에는 시민들이 밝힌 촛불과 향냄새가 가득했고 지하 2층에는 꽃을 든 시민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추모글이 빼곡이 쓰여있는 역 구내 기둥을 보던 시민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한다"며 꽃을 올렸다. 아들 딸을 데리고 나온 주부 김미향씨(38)는 "남의 일이 아니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도 퍼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비문(碑文)'으로 바뀐 이 그을린 기둥은 '이번 사고를 영원히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구 보존될 예정이다.

역 구내 벽 곳곳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글과 함께 책임자를 밝히고 재발방지를 촉구하는 글도 많이 걸렸다. 한 시민은 "평소 지하철 요금이 얼마인줄도 모르고 고급차만 타는 정치인들이 이번 사고를 정말 마음 아프게 느끼는지 의문"이라며 "대통령부터 각성해야 한다"는 글을 붙였다. 지하철사고 재발방지를 위한 시민 서명에는 한시간에 1000여명이 서명을 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대한불교조계종 9교구 본사인 동화사와 대구사원주지연합회 스님 100여명은 사고 현장에서 목탁과 독경으로 숨진 영혼을 달랬다. 지하철역에 울려퍼지는 목탁소리에 맞춰 두 손을 모으고 함께 기도를 올리던 시민들은 "숨진 영혼들이 어찌 이곳을 쉽게 떠나갈 수 있겠느냐"며 눈시울을 적셨다.

1시간동안 천도재를 올렸던 동화사 주지 지성(知性) 스님은 "뜨거운 불 속에서 몸부림쳤을 안타까운 영혼을 생각하니 참으로 가슴이 아프다"며 "온 국민이 숨진 영혼을 달래면 이들도 사고를 잊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앙로역 근처 서성로교회에서는 시내 교회 목사들이 모여 희생자 추모기도회를 열었다. 설교를 맡은 대구기독교총연합회 권오정(權五正·63·대구서교회) 회장은 "함께 죽고 싶었다는 방화범의 이야기를 듣고 종교인으로서 자책감을 느꼈다"며 "많은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그동안 제역할을 다했는지 이번 사고를 통해 반성하고 이웃사랑이 우리사회에 넘치도록 더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구시는 이날 오전 10시 정각 1분동안 대구 전역에 추모 사이렌을 울렸으며 시내 1000여개 사찰과 교회, 성당에서도 일제히 종을 울리며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시민들은 궂은 날씨에도 시내 곳곳에 모여 희생자를 기렸다. 국채보상기념공원에서 달구벌대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나왔다는 시민 황재윤씨(58·대구시 중구 동인동)는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지만 이번 사고는 남의 일이 아니다"며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차를 타고 시내를 오가던 많은 운전자들도 추모사이렌에 맞춰 일제히 경적을 울리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렸다. 택시기사 손붕익(孫鵬翼·64)씨는 " "택시에 오르는 손님마다 사고가 참으로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며 "평소 사고 대비를 조금만 꼼꼼하게 했더라도 이런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답답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말했다.

대구참여연대 등 지역 37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대구지하철 참사 시민사회단체 대책위원회'는 20일부터 3일째 저녁마다 중앙로역 입구에서 촛불을 켜고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실종된 딸(대구대 미대 4학년)을 대신해 21일 대학졸업장을 받은 유가족 정대술(鄭大述·56·경산시 하양읍)씨는 "시민들의 추모가 고맙지만 사고현장에서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는 등 치밀하지 못한 사고수습에 분통이 터진다"고 말했다. 실종자 유가족들은 철저한 현장조사를 요구하며 중앙로역 출입구를 막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평소 일요일이면 시민들이 몰리던 대구시내 유원지와 백화점 등도 비교적 한산했다. 중앙로역 주변 번화가의 유통매장은 확성기 소리 대신 근조 현수막을 내걸었으며 합동분향소가 있는 대구시민회관에는 이날까지 전국에서 2만여명이 찾아 슬픔을 함께 했다.

대구=이권효기자 bor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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