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배운 한 푸니 세상이 보여요" 고졸학력 따낸 72세 안정숙씨

  • 입력 2002년 5월 5일 18시 21분


【“배움이 없으면 눈을 뜨고도 앞을 보지 못하는 것과 똑같아요. 이제 조금 길이 보이는 것 같아 하루하루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한글도 제대로 몰라 대통령선거조차 주위의 도움을 받아야 했던 칠순 할머니가 1년 만에 검정고시를 연거푸 3차례 합격해 고졸 학력을 얻어 화제다.】

주인공은 지난달 5일 치러진 고졸 검정고시 전국 최고령 합격자인 안정숙(安正淑·72·서울 금천구 독산본동·사진) 할머니.

안 할머니는 지난해 5월 초등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하는 중학입학자격 검정고시, 8월에는 고입 검정고시에 최고령으로 합격한 데 이어 이번에 고졸 검정고시까지 합격했다.

이번 고입과 고졸 검정고시는 전국에서 3만4543명이 응시해 46.1%(1만5936명)만 합격했을 정도로 만만치 않은 시험이었다.

“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해 항상 남들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하는 요령으로 살아온 게 가장 한스러워요. 대통령을 뽑을 때도 주위에서 “이 사람이 훌륭하다”고 하면 아무 생각없이 투표했어요.”

안 할머니는 ‘못 배운 죄’ 때문에 항상 눈치를 보며 남들 뒤에 숨었던 것이 지금도 안타깝다고 한다. 요즘도 길을 가다가 큰 건물을 보면 습관적으로 이름과 위치를 외워둔다. 버스노선표를 잘 읽지 못해 큰 건물을 익혀 두었다가 길을 묻곤 하면서 생긴 버릇이다.

“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한글 맞춤법이나 수학 문제를 물어볼 때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어요. 가정통신문에 글 하나 제대로 써주지 못하는 어미 심정을 누가 알겠습니까.”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가 병치레를 하면서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초등학교 4학년을 중퇴한 것이 안 할머니의 학력의 전부. 아버지의 별세, 6·25전쟁 등 격동의 세월에 묻혀 학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 군인이었던 남편과 사별한 뒤에는 1남2녀 뒷바라지 때문에 공부할 생각은 엄두도 못냈다.

그러던 안 할머니는 성인 대상 평생교육시설인 ‘양원주부학교’를 TV에서 보고는 눈이 번쩍 뜨였다. 용기를 내 이 학교에 등록한 뒤 95년부터 3년간 한글 읽기와 쓰기, 영어, 수학, 한문, 일본어 등 중고교 과정을 배웠다.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예습 복습을 거르지 않았다. 미국 여행을 다녀오느라 결석한 1주일을 빼고는 단 하루도 결석하지 않았다.

“국어나 외국어는 물론 사회나 과학을 공부할 때도 낯선 말이 나오면 사전을 꼭 찾았어요. 스스로 찾아보며 연구하는 것이 가장 기억에 오래 남더라고.”

모르는 것은 반드시 사전을 찾고 한번 배운 내용은 노트에 깨알같이 적고 큰소리로 읽어가며 외우는 것이 안 할머니의 공부 비결.

그는 “환경이 좋은데도 공부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보면 안타깝다”며 “힘들고 어려워도 꾸준히 노력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안 할머니는 올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보지 않고 입학이 가능한 방송통신대에 진학해 문학을 전공할 생각이다. 요즘은 인터넷을 배우기 위해 5개월간 컴퓨터도 배우기로 했다.

자동차부품 사업을 하는 장남 황해권(黃海權·49)씨 내외의 격려도 안 할머니에게는 큰 힘이 됐다.

손녀 황재희(黃載喜·17·고1)양은 “새벽에 식탁에서 스탠드 불을 켜고 공부하는 할머니 모습을 보면서 투정부리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며 “할머니 못지 않게 열심히 공부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인철기자 in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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