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없는 '간첩 혐의' 공표 위법

  • 입력 2001년 7월 20일 19시 29분


간첩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는데도 공안당국이 검찰 기소에 앞서 이를 공표한 것은 위법이므로 국가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지법 민사합의42부(조수현·趙秀賢 부장판사)는 94년 ‘구국전위’사건 당시 간첩으로 몰려 구속됐으나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이모씨(45)와 가족이 “기소 전에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간첩이라고 발표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20일 “국가는 이씨 가족에게 8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안기부(국정원 전신)가 94년 6월 ‘구국전위’사건 당시 이씨 본인의 진술이나 물증을 전혀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혐의자들의 피의 사실을 언론에 발표했다”며 “유일한 증거는 신빙성이 떨어지는 관계자 1명의 진술뿐이었는데도 안기부가 마치 범죄사실이 확정된 것처럼 공표한 것은 피의 사실 공표에 해당되므로 위법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수사기관의 발표는 일반 국민의 정당한 관심이 되는 사안에 대해 객관적이고 충분한 증거나 자료를 바탕으로 한 사실에 한정돼야 한다”며 “이 사건 발표가 공공성이나 공익성의 요건을 충족한다 하더라도 진실성의 관점에서는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94년 6월 북한 노동당의 남조선 지하당인 ‘구국전위’에 가입한 혐의에 대해 안기부가 자신을 ‘전북지역책’으로 발표하자 도피해 지명 수배됐으나 96년 안기부에 자진 출석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씨는 1심에서 징역 3년6월 및 자격정지 3년이 선고됐으나 상급심에서 “구국전위 지도부의 일부 진술 외에는 간첩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가 선고되자 소송을 냈다.

<이정은기자>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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