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이후 인권 판례]'미란다원칙' 92년 대법 첫 인정

  • 입력 2000년 11월 24일 18시 42분


‘영장실질심사를 받을 권리’를 침해한 상태에서의 구속은 위법하다는 법원의 결정에 대해 법조인들은 “피의자 인권보장에 기여한 용기 있는 결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이번 결정은 수사와 재판 과정이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경우 혐의내용과 상관없이 ‘위법’이라는 형사소송의 대원칙을 재천명, 과거 인권판례들의 맥을 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80년대 이후 재판사에 남을 만한 대표적 인권 판례를 소개한다.

▽자백강요 금지〓‘법원사(史)’는 수사기관의 부당한 강압수사에 제동을 건 첫 판결로 82년 김시훈(金時勳)씨 사건을 꼽는다. 김씨는 살인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된 뒤 범행을 부인하다가 경찰관의 혹독한 고문에 못 이겨 범죄를 자백하는 자필진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김씨는 법원에서 줄곧 억울함을 호소했고 대법원은 그 해 9월14일 “강요에 의해 작성된 자술서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단,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은 무죄심리가 끝나고 판결이 내려지기 직전 진범이 잡혀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변호인 접견권 보장〓대법원은 90년 9월 간첩 활동을 하고 대형 걸개그림 슬라이드를 평양축전에 보낸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된 홍성담 피고인에 대한 상고심에서 “검찰이 변호인 접견을 허용하지 않은 채 작성한 1차 피의자신문조서 내용 중 일부는 증거능력이 없다”고 판시했다. 당시로서는 거의 형식적인 법조항에 불과했던 피고인의 변호인 접견권을 실질적인 피고인의 권리로 끌어올렸다.

▽미란다원칙 고지 의무〓미국에서는 63년 판례로 확립된 ‘미란다원칙(체포시 진술거부권 등을 알려줘야 한다는 원칙)’ 고지 의무가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로 나타난 것은 92년. 대법원은 부산지역 폭력조직인 신20세기파의 두목 안모씨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하며 “수사기관이 피의자를 신문하면서 사전에 진술거부권을 알리지 않은 경우 이 진술은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올 7월에도 “미란다원칙을 지키지 않고 용의자를 체포하려 한 행위는 정당한 공무집행이 아니므로 이에 저항한 피의자의 행위는 정당하다”며 한모씨에게 적용된 공무집행방해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밤샘조사 자백 무효〓대법원은 97년 7월 수재 등 혐의로 기소된 문모씨 사건에서 “수사기관이 피의자에게 잠을 재우지 않고 받은 자백은 증거로 쓸 수 없다”고 판시했고 98년 4월에도 같은 이유로 뇌물수수 혐의자 박모씨가 무죄취지의 판결을 받았다.

▽불법 불심검문 금지〓서울지법은 97년 시위현장 부근에서 소지품 검사를 강요당한 장모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300만원의 배상판결을 내렸다.

경찰관이 혐의자를 불심검문하려면 자신의 소속과 이름, 검문 이유 등을 고지할 의무가 있다는 취지. 판결 이후 경찰의 불심검문 절차가 개선됐고 유사 소송이 잇따랐다.

<신석호기자>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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