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대란]“수술연기”에 응급환자 발동동

  • 입력 2000년 6월 18일 19시 35분


《전공의들의 집단파업과 병의원의 집단폐업을 이틀 앞둔 18일 전국 각 병원에서는 벌써부터 진료대란이 시작됐다. 종합병원에서는 수술환자의 일정이 연기되는가 하면 상태가 호전된 일부 입원 환자를 퇴원시키고 있어 환자와 가족들의 거센 항의가 잇따르고 있다. 일부 대학병원에서는 전공의들의 파업에 대비해 교수들이 직접 응급실과 야간환자를 진료하기 위한 비상당직표를 마련하는 등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암환자까지 수술늦추기도▼

대장암 환자 박모씨(55)는 18일 서울 J병원에서 개복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판정이 나왔지만 전공의 파업 때문에 곧바로 수술 받지 못하고 이달말 재입원해 수술을 받기로 약속을 받고 퇴원해야 했다.

그는 “내 몸 안에서 암세포가 자라고 있다. 빨리 수술 받으면 살 수 있는데 이렇게 시일을 늦추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지만 병원측에서 “어쩔 수 없다. 정상화되면 최우선으로 수술을 해주겠다”는 답변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날 서울대병원에서 아들(6)의 눈 수술을 기다리고 있던 회사원 김모씨(35)는 “적기에 수술을 받지 못해 아들이 실명하지 않을까 애가 탄다”고 말했다.

서울대병원 응급실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100여명의 응급환자로 북적거렸으며 응급실 정문에는 전공의협의회 명의로 의약분업 연기를 주장하는 대자보가 붙었다.

응급의학과 전공의 A씨(27)는 “평상시에도 응급환자를 모두 진료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전공의들의 집단파업이 시작되면 새로 발생하는 응급환자의 90% 이상은 발길을 돌려야 한다”며 “경험으로 볼 때 20일 정오가 되면 서울시내 모든 응급실이 만원이 돼 마비사태가 일어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평소 빈 병실이 없는 서울대병원 내과병동의 경우 18일 오후 3시 현재 500병상 중 320명만 입원한 상태. 특히 11층 내과 3개 병동 107개 병상 중 63개만 입원환자가 있어 44%가 비어있다.

▼"병원서 나가라니 황당"▼

암환자 김모씨(54)는 “3년 동안 서울대병원에 21번 입원했지만 병실이 이렇게 텅텅 비기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항암치료를 받고 20일 퇴원해야 하는데 상태가 갑자기 악화돼도 다시 입원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황당했다”고 말했다.

김씨는 “환자가 없는 의사는 무용지물 아니냐”며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한 어떤 행위도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흥분했다.

이날 오후 서울 경희의료원에서 폐렴으로 4일째 입원중인 아들을 돌보던 김모씨(32·여)는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은 데 병원에서 나가라니 어디 가서 치료를 받느냐”며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은 초진 환자의 진료는 모두 7월10일 이후로 미뤘고 재진 환자와 응급실 중환자실은 일단 진료한다는 방침을 세웠지만 일부 교수들이 반발하고 있어 이나마 진료가 계속될지 미지수인 상태다.

이 같은 진료대란은 지방의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에서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

부산 중구 대청동 메리놀병원은 20일 전까지 500여명의 입원환자 가운데 회복상태가 좋은 10% 가량을 퇴원시킨 뒤 응급환자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입원환자를 받지 않기로 했다. 84건의 예약수술도 응급수술을 제외하고 20일 이후로 무기한 연기하기로 했다.

관절염이 악화돼 18일 울산 D병원을 찾았던 최모씨(여·69·울산 북구 천곡동)와 보호자는 수술일정을 잡으려고 상담했으나 병원측이 “의사들이 집단 휴진하는 20일 이후의 수술일정을 잡기 어렵다”며 돌려보내자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의 환자를 두고 이럴 수 있느냐”고 고함을 치며 항의했다.

전공의와 수련의들이 일괄 사퇴서를 제출한 부산 부산진구 개금동 백병원과 서구 동대신동 동아대병원 등 각 대학병원의 경우 교수들이 비상당직표를 작성해 입원실과 중환자실 응급실 근무 전공의 등을 대신할 일정을 조정하는 등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갔다.

서울대병원의 경우 전공의들의 파업에 대비해 교수들이 2명씩 한 병실을 맡아 환자를 돌볼 예정이지만 교수들은 “제대로 환자를 돌볼 수 있을지 걱정돼 입이 바싹 마르는 지경”이라고 말했다.

▼"先시행 後보완 못믿어"▼

연세대의대 내과 한광협(韓光協·47)교수는 “정부안대로 의약분업이 시행되면 전문의약품의 상당수가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돼 의약분업의 취지가 지켜질지 의문”이라며 “복지부가 ‘선 시행 후 보완’을 말하지만 ‘힘’도 예산도 없는 복지부가 엄청난 예산이 드는 의약분업을 제대로 시행할 수 있을지 의사들은 의구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강남구의 피부과 의사 K씨(51)는 “정부와 의사가 극을 향해 치닫는 것은 피해야 하지만 현재 의사들 내부에서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의견을 낼 수 없는 분위기”라면서 “복지부와 의쟁투가 서로 합의점을 끌어내는 것이 불가능하며 정부 최고위층의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슈부·지방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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