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원혜중씨의 소망]"북녘동포에 늘 마음의 빚"

  • 입력 2000년 6월 12일 19시 37분


“북녘 고향에 계신 분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을 길이 열린다면….”

서울 유학중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북녘의 가족들과 헤어지게 된 원혜중(元惠中·71·서울 성동구 옥수동 H아파트)씨가 요즘 새벽기도 끝에 덧붙이는 기원이다.

명문 평양고보 출신인 그의 고향은 평양에서 150리쯤 떨어진 평남 성천군 삼덕면. 전쟁으로 북녘에는 어머니가 2남7녀 중 누님 셋과 여동생 하나를 데리고 남았고 자신은 누님 셋, 남동생과 함께 남쪽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다.

“고향에 계신 분들이 내 뿌리를 지키고 있어요. 어려운 형편에 조상도 모시고 고향의 문화와 전통도 잃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어요. 저 같은 실향민이라면 누구나 고향에 계신 분들에게 ‘빚’이 있다고 느낄 거예요.”

그는 반세기 동안 이런 ‘채무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빚’을 갚고 싶어도 ‘채권자’를 만날 수조차 없는 분단의 현실이 그를 늘 가위눌리게 했다.

“남북은 50여년간 정반대의 길을 달려왔어요. 그래서 둘 사이는 합쳐서 100년 이상 떨어져 있어요. 이제는 걷는 방향만큼은 같도록 해야죠.”

▼北학생 南서 공부할날 오길▼

그래서 그는 북녘의 젊은이를 남으로 데려와 공부시킬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남쪽의 실향민들이 어쩌면 조카뻘 손자뻘될 북한 학생들을 1명씩만 책임지면 그것이 바로 ‘빚’을 갚는 것이라는 게 그의 오랜 생각이다. 실제로 그는 몇몇 실향민 친구들과 함께 서울에 북한 청소년들을 위한 기숙사 건립 계획까지 세운 적도 있다.

▼"고향서 牧會" 63세에 목사▼

“이번 회담을 계기로 남북간 인적(人的) 교류의 물꼬만 트여도 얼마나 좋겠어요.”

30여 년의 공직생활을 거쳐 지금은 변리사로 활동하고 있는 원씨는 남쪽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왔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텅빈 채였다.

“80년대 말에야 방북한 남동생(59·재미교포)을 통해 ‘어머님이 65년에 돌아가셨고 하나뿐인 여동생도 병으로 숨졌다’는 걸 알았어요. 그러나 아직도 어머님 제삿날을 몰라 대신 생신날 추모예배를 드립니다. 부모님 묘를 돌봐줄 사람도 없다는데….”

그는 92년 63세의 나이에 목사가 됐다. 여생의 소원이 옛날 할아버지가 고향에 세우셨던 교회 자리에 다시 교회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동요 ‘고향의 봄’에 가사만 바꾼 ‘내 고향 삼덕면가’를 자주 부른다.

“고향 떠나 반백년 백발청춘아/나의 부모 나의 형제 살아있는 곳/늙지 말고 회춘하여 고향가련다/그곳으로 갈 때까지 열심히 살자/….”

<부형권기자>booku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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