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의 날…엇갈린 명암

  • 입력 2000년 4월 19일 19시 40분


▼"건강한 齒 가꾸세요"…서초구 장애인전용 치과▼

“조구청장, 내 평생 소원 하나만 들어주시오. 혹시 ‘장애인 치과’를 아시오.”

96년 봄 경기 광주군의 한 장애인교육원 행사에 참석한 치과의사 기창덕(奇昌德·당시 가톨릭의대 교수)박사는 조남호(趙南浩)서울 서초구청장을 붙잡고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대한의사학회장 등을 역임하며 나환자와 불우이웃 치료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기박사는 장애인 전용 치과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절절히 쏟아냈다.

“자폐아 뇌성마비 시각장애인들은 이가 썩어 뿌리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입을 벌리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심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입을 벌리는 것이 치료의 90%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치료과정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일반병원에선 장애인을 거의 받지 않습니다….”

또 장애인의 몸을 묶는 특수장비가 없으면 치료 도중에 입안을 다치는 경우가 많아 장애인 전용치과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 기박사의 설명이었다.

조구청장은 “당시 기박사의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 계기가 돼 96년 9월 문을 연 ‘서초구 장애인치과’는 그동안 5300여명을 치료했다. 지금은 예약이 밀려 두달은 기다려야 할 정도.

뇌성마비 장애인 한송이씨(24·여)는 “이가 아파도 치과에 갈 엄두를 못냈는데 우연히 알게 된 장애인치과에서 8개월 동안 보철 치료까지 받은 뒤 밥도 잘먹고 삶의 의욕도 되찾았다”고 고마워했다.

서초구 장애인치과는 서울시에서 받은 1억원의 보조금으로 장애인용 앰뷸런스, 초음파 치석 제거기 등 첨단시설을 도입하고 올 2월18일 제2의 개원식을 가졌다.

췌장암으로 걷기도 힘든 상태에서 개원식에 참석했던 기박사는 지난달 20일 7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기박사의 부인 정경숙(鄭敬淑·71)씨는 “그런 몸으로 어떻게 개원식에 가느냐고 말렸지만 ‘장애인 치과가 잘 되는 걸 봐야 눈을 감는다’고 우기셨다”며 “눈을 감는 날까지 ‘빨리 완쾌돼 장애인들을 치료해야 하는데…’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교대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서초구 치과의사회 소속 의사 20여명 중 한명인 꾸러기치과 최지원(崔芝媛)원장은 “우리의 역할은 기박사가 뿌려놓은 씨앗을 큰 나무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어디로 가야하나요"…철거위기 남양주 '나눔의집'▼

“작은 비바람에도 가슴 떨며 이슬비에도 잠 못 이룹니다 / 산과 들에는 진달래 개나리 피어나는데 / 이 곳 버려진 땅, 우리들의 가슴엔 근심만 피어납니다.”

장애인 시인 서주관씨(39)가 휘어진 손가락으로 힘겹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시를 써 내려간다. 하지만 항상 은근한 미소를 머금던 그의 얼굴에 더 이상 웃음은 찾아볼 수 없다. 10년째 살아온 삶의 터전 ‘나눔의 집’이 사라질 운명에 놓였기 때문이다.

경기 남양주시 퇴계원면 나눔의 집은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장애인 박창진(朴昌鎭·42)목사가 서씨를 비롯한 33명의 장애인과 함께 10년째 생활해 오고 있는 곳. 90년 박목사가 3명의 장애인을 이끌고 허허벌판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생활하기 시작한 뒤 지금은 두 채의 건물을 지어 살고 있다.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살아오던 장애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에 처한 이유는 지난달 21일 남양주시가 이들에게 퇴거명령을 내렸기 때문. 나눔의 집이 있는 퇴계원1리는 상습침수지역으로 98, 99년 연속으로 수해를 입었다. 결국 남양주시는 수해를 방지하기 위해 이곳에 제방을 쌓기로 결정했고 나눔의 집은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철거될 위기에 놓였다.

나눔의 집은 시 소유지에 ‘불법’으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장애인들은 시의 결정에 반발할 근거가 없다. 시는 이주비용을 주겠다고 하지만 새로 집을 지을 땅 자체가 없는 한 이주비용만으로 살 곳을 장만하기는 불가능하다. 결국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다.

시 관계자는 “안타까운 사정은 알지만 홍수를 막기 위해 다른 방법이 없다. 이들이 살 수 있는 땅을 마련해주는 것도 법적인 근거가 없어 어렵다”고 말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나눔의 집 가족들은 ‘살 곳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곳에서 생활하며 시집도 한권 내 ‘장애인 시인’으로 불리는 서씨는 “세상이 이미 나를 한번 버렸는데 또다시 버림받고 싶지 않다”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우리는 절대 헤어질 수 없습니다. 이곳 장애인들은 세상 모든 곳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인데 나눔의 집이 사라지면 누구를 의지하겠습니까.” 박목사의 안타까운 호소다. 연락처 0346-571-5589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