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밸리 자장면배달도 벤처式…정장+007가방 '위장'

  • 입력 2000년 3월 7일 20시 06분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한 서울벤처밸리에서 중국음식을 배달하는 L씨(32). 벤처붐이 일기 시작한 지난해 가을 무렵 그는 두가지 새로운 ‘장비’를 마련했다.

정장 자켓과 검은색 여행가방이다. 벤처기업이 입주한 빌딩의 주인들이 건물에 음식냄새가 진동한다며 음식물 반입을 금지해 이 ‘장벽’을 뚫는 수단으로 중국집 배달원이 아닌 벤처 직원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다.

L씨는 보통땐 편한 케쥬얼 차림으로 음식을 나르다 벤처업체에서 주문하면 건물 앞에서 오토바이 한켠에 싣고 다니는 넥타이를 꺼내 매고 정장 자켓을 걸친다. 음식은 철가방이 아니라 7인분을 담을 수 있는 검은색 여행가방에 넣는다. L씨처럼 정장 차림으로 음식을 배달하는 게 최근 서울벤처밸리에선 신풍속도로 자리잡고 있다.

L씨는 “벤처 직원들은 식사시간이 불규칙한 경우가 많아 밥을 자주 시켜먹는다”며 “음식물 반입을 금지한 건물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정장을 입고 음식을 배달한다”고 말했다. L씨는 이 지역의 10여개 중국음식점이 이처럼 배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정장을 입기 싫어하는 배달원들은 경비원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된 통로로 들어가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뒷문의 비상계단을 이용하기도 한다.

한 중국음식점 경영주는 “배달 여건이 나빠져 서울벤처밸리로 들어오려는 배달원을 구하기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사정은 분식집과 피자집도 마찬가지. 분식배달원은 신문지를 덮은 쟁반을 놔두고 쇼핑백에 음식을 넣어 나른다. 피자배달원들은 아예 정문에서 벤처 직원에게 피자를 전달한다.

웹에디터 생산업체인 ㈜나모인터렉티브 서기화 홍보팀장은 “우리 회사는 지난달 테헤란로로 옮기며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 전세계약서에 ‘음식을 시켜먹어도 좋다’는 조건을 달았다”며 “우리와 비슷한 조건을 명시하는 벤처업체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김호성기자>ks1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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