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통근무 외국인 경험담]"전자결제 귀찮다" 도입묵살

  • 입력 2000년 1월 10일 19시 48분


“아직 한국 공기업은 멀었다. 관료적 발상과 무사안일주의가 전조직에 판을 치고 있다.”

연매출 8조원이 넘는 국내 최대의 공기업 한국통신에 금융전자결제시스템 등의 도입을 위해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한 외국계 컴퓨터 회사 직원 A씨는 한국통신의 업무상 비효율성을 이렇게 압축했다.

▼무사안일주의 팽배▼

A씨는 지난해 5월 한국통신측과의 계약에 따라 “최적의 전산시스템을 도입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컨설팅을 위해 직원 20여명과 함께 파견근무를 하고 있다.

1월로 한통근무 8개월째. A씨는 일을 진행하면 할수록 난공불락의 관료주의와 복지부동의 벽에 부닥쳐 숨이 막힐 지경이라고 말한다. 현장엔 무력감이 팽배하고 적당히 타협하며 ‘사고만 나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무사안일주의가 판을 치고 있는데도 자각증상이 거의 없다는 데 A씨는 더 충격을 받고 있다.

A씨가 이를 뼈저리게 느낀 것은 ‘전자결제시스템’의 도입 때. 월급과 특근수당 출장비 등을 컴퓨터를 이용해 결제하는 이 시스템은 비용과 시간 및 인력을 대폭 줄일 수 있어 대기업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일반화되어 있는 것.

그러나 한국통신의 경우 A씨팀이 이 시스템의 도입을 건의한 지 4개월이 지난 뒤 “안전하지 못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도입이 보류됐다. 건의할 당시에는 예산까지 확보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지만 이후 수작업결제에서 한번 오류가 나자 한통은 “수작업에서도 사고가 나는데 직원들이 사용법을 잘 모르는 전자결제는 사고가 더 많아질 것”이라며 묵살하고 말았다. A씨는 “전자결제시스템은 오히려 사고를 줄이기 위한 것”이라며 “전자결제시스템 사용법을 모른다는 이유로 수작업을 하겠다니 참 어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A씨를 더 황당하게 만든 것은 결정이 내려지는 과정. 허가를 받기 위해 무려 4개월 동안 10여개의 문서를 작성해야 했고 사업추진위원회 워크숍 미팅 팀장회의 등 4, 5곳의 결제라인을 쫓아다녀야 했다.

한 라인에서 결를 받기 위해 서류를 작성했다가 회의가 취소되면 다음 라인에서 결를 받기 위해 처음부터 서류를 다시 작성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업무 책임 소재 불투명 ▼

업무의 목적과 책임소재가 분명치 않고 보고나 설명은 능숙하지만 실천은 잘 안되는, 그러면서도 상사의 취향에 맞추는 것을 당연시하는 이상한 풍토도 A씨에겐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었다.

A씨는 “다른 대기업에서도 비슷한 작업을 해 봤지만 공기업과는 ‘하늘과 땅’차이가 있었다”며 “한국 공기업이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경쟁력을 점점 잃고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워했다.

▼한통 "새시스템 구축중"▼

이와 관련, 한국통신측은 “지난해 5월부터 공기업으로는 최초로 경영혁신 차원에서 전사적 자원관리시스템(ERP)을 구축하고 있으며 A씨가 말하는 금융전자결제시스템은 ERP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으로 대형 금융사고에 대한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입을 보류했다”고 밝혔다.

한국통신측은 또 “우리 회사가 A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관료적이라면 민간기업보다 앞서서 전체 업무처리 프로세스를 혁신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완배·김승진기자> roryre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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