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건물 화재 안전불감「중증」…구조 늑장에 안내도 없어

  • 입력 1998년 10월 20일 19시 27분


“언제까지 이렇게 안전을 무시해도 좋을까요. 말로만 듣던 한국사회의 ‘안전무시’에 그만 질려버렸습니다. 미국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요.”

19일 밤 1명의 희생자를 낸 서울 중구 프레지던트호텔 2층화재를 지켜본 투숙객 재미동포 한의사 최경희(崔敬姬·여·45·미국 뉴욕)씨와 이애자(李愛子·여·53·미국 시카고)씨. 두 한의사는 경희대에서 열리고 있는 ‘국제 한의학 학술회의’ 참석차 17일 입국해 이 호텔에 묵고 있었다.

27층 객실에서 잠을 청하던 최씨가 시끄러운 소방차 사이렌 소리에 눈을 뜬 것은 밤 11시25분경. 곧이어 침대머리의 호텔전용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긴급방송’에 최씨는 재빨리 옷을 입고 복도로 나왔다.

▼ 비상시 안내부재 ▼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한 최씨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상구를 찾기도 어려웠지만 어디에서 불이 났는지 몰라 옥상으로 가야할지 밑으로 내려가야할지 판단이 안섰다. 물론 안내도 없었다.

27층 복도에는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미국인 일본인 등 10여명의 관광객들이 엘리베이터 단추를 계속 누르며 발만 동동 굴렀다. 최씨는 일단 이들과 함께 연기를 뚫고 32층 옥상으로 올라갔다.

▼ 교통통제 소홀 ▼

같은 시간 2727호에서 샤워를 마친 이씨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5층에서 불이 났으니….” 이씨는 곧바로 옥상으로 대비했다.

옥상에 먼저 도착한 최씨는 매캐한 검은 연기를 피해 난간으로 갔다가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20여대의 소방차 사이로 아무런 통제도 받지 않고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서는 소방차의 진행을 방해하는 차량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범칙금 스티커를 발부하고 심한 경우 운전면허증까지 뺏죠.”

▼ 구급 인명경시 ▼

최씨는 컴컴한 옥상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아래층에서 계속 올라오는 연기와 싸우며 또한번 분노를 느꼈다. 화재가 난 지 30분이 지났는데도 헬리콥터 한대, 구급차 한대를 구경하지 못했던 것. 말로만 듣던 고국의 생명경시 풍조와 안전불감증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소화기 경보기관리 ▼

이씨는 이날 확인하게 된 안전시설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호텔에는 객실마다 소형 개인소화기가 비치돼 있어 언제든지 화재에 즉각 대처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복도에 한두개 비치된 것이 전부였다는 것.

더구나 이날 호텔에는 화재가 났는데도 ‘연기 경보기’는 작동되지 않았다.〈이호갑기자〉gd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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