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자를 향해 돌진하는 수억마리의 정자들. 그중 가장 빨리 헤엄친 한마리가 살아남는 공정한 경쟁의 태생(胎生)처럼 한국 사회에서의 성공은 이제 ‘헤엄’의 문제로 귀결될까? 다시 K씨.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줄서기같지 않은 줄서기가 구조조정 와중에 생겨나고 있는 것같다. ‘잘나가는’ 사람들의 ‘끼리끼리 모임’이다.”
기업경영의 완성판이라는 미국사회. 줄서기는 있을까?
다국적기업인 T사의 이사를 지낸 K씨. “상사의 집 잔디를 깎아주는 미국인을 보고 처음엔 놀랐다. 숨기지 않고 ‘난 이 사람의 라인이다’고 밝히는 게 아닌가.
다만 ‘내가 잔디를 깎기 때문에 업무능력을 인정받는 게 아니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잔디를 깎아도 뒷탈이 없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능력위주의 사회와는 도통 궁합이 맞지 않을 것같은 줄서기. 그러나 형태가 달라질 뿐 오히려 더 내밀하고 확실하게 존재하리라는 전망이 많다. 줄서기의 새로운 매커니즘이 바로 ‘능력과 업적’이라는 것.
국제능력개발원 서근석원장. “줄서기는 필요악이다. ‘줄’간의 경쟁과정에서 조직의 발전이 나온다. 다만 앞으로는 보스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줄이 도태되고 경쟁력있는 자들의 경쟁력있는 줄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능력사회에선 최신 고급정보에 접근하는 것이 성공수(手). 회사의 주력사업 인사 구조조정 등에 관한 생존정보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관건이다. D그룹 인사담당자 P씨. “잘 나가는 선배는 잘 나갈 가능성이 있는 후배를 주로 상대한다. 제 아무리 동향(同鄕) 동문(同門)이라도 영업실적이 저조한 후배에게는 선배 자신의 이미지를 구길까봐서인지 자판기 커피조차 사주기를 꺼린다. 기획실의 촉망받는 선배와 친하다는 것만으로도 능력을 인정받는 분위기다.”
아니꼬우면 잘나가라? 능력있는 사람만이 ‘능력인 클럽’에 줄을 대고 그래서 더욱 생존능력이 강해지는 상승효과.상사의 중학교후배일지라도 업적 없이는 ‘라인맨’을 꿈꿀 수조차 없는 분위기. 결국 ‘줄’의 득세도 복권추첨과 같은 ‘n분의 1’ 확률이 아닌, 애초부터 성공인 줄서기와 실패인 줄서기로 갈라지는 ‘라인의 부익부 빈익빈’시대가 도래?
연공서열 타파를 주장하며 ‘수구세력과 투쟁하기 위해 인맥을 만들고 있다’고 밝힌 H제조업체 L기획부장. “수구파 ‘척결’은 ‘목’을 날리는 ‘단칼형’도 있지만 경쟁력있는 내 라인을 형성해 압박하는 것이 가장 잔인하고 확실한 방법이다.
이런 ‘고사작전’은 시간이 걸리지만 후유증이나 보복이 절대로 없다. 어떤 기준에서 봐도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들로 이뤄진 인맥이기 때문이다.
조훈현과 제자 이창호로 이어지는 바둑계보를 보라. 감언이설이나 공갈협박이 어찌 ‘줄바둑’을 농락할 것인가.”
〈이승재기자〉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