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숙자 24시]행정당국도 외면…폭발직전의 불만

입력 1998-05-24 19:56수정 2009-09-25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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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일대 노숙자는 최근 상경한 ‘원정 실직자’까지 합쳐 그 수가 1천여명으로 불어났다. 처음에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차츰 실직자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일을 포기하고 노숙자가 된다. 그러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고 알코올중독자가 돼가는 등 도시의 부랑자로 전락하고 있다.

집단으로서의 그들은 벌써 사회적 불만세력이거나 소외집단에서 어떤 변혁을 기다리는 ‘잠재적 시한폭탄’같은 존재로 변해 있다.

▼ 건강 질병문제 ▼

노숙자들은 계속되는 노숙생활 폭음 불규칙한 식사 등으로 인해 위장병 근육통 폐결핵 등 각종 질병을 앓고 있었다. 특히 이달초 연달아 2명의 지하노숙자가 폐결핵으로 죽어 지하통로에서 생활하던 실직노숙자들이 충격을 받고 대합실과 서소문공원으로 이동했다. 결핵협회가 노숙자 4백67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이중 10%인 46명이 결핵증상을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태.

국립의료원 이동진료봉사단측은 “여섯차례에 걸쳐 이들을 진료해본 결과 위장병 감기 폐결핵 등의 질병을 두세가지씩 앓고 있는 경우가 절반을 넘었다”고 말했다.

▼ 부랑자 전락 ▼

20일 오전 11시 서울역광장. 17년간 인쇄업에 종사하다 2주전 노숙생활을 시작한 방모씨(42)가 술에 만취한 채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10여분만에 1천원을 모은 방씨는 서울역인근 음식업소 몇 군데를 찾아가 손을 벌린 끝에 1천5백원 정도를 더 구걸, 다른 실직자 2명과 함께‘깡소주’로 대낮 술판을 벌였다.

방씨는 2월말경 실직한 뒤 이곳으로 와 일자리를 얻으려 발버둥쳐봤지만 허사였고 가슴 가득 치미는 울화를 견디다 못해 한두잔씩 술을 들이켜다보니 어느새 구걸을 마다않게 된 것이다.

대개 노숙 생활 한달이 지나면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과 취업의욕을 상실한 채 술에 찌들어 심한 무기력증을 보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부랑자의 생활에 젖어들고 있다. 노숙자 중에는 중소기업체사장 자영업자 식당종업원 건설직 일용노동자 등 전직이 다양했다.

▼ 자포자기성 범죄 ▼

실직 노숙자들은 툭하면 주먹다짐을 벌인다. 역전파출소에만 하루 평균 10여건의 실직노숙자 폭행 사건이 접수된다. 특히 최근에는 지나가는 일반 행인에게까지 괜한 시비를 걸어 폭행하는 사례가 급증하고 있다.

노숙자들이 범죄에 이용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들이 팔거나 분실한 주민등록증은 앵벌이조직 등을 통해 주민증위조단에 넘겨져 금융사기 등 각종 범죄에 이용되고 있다.

한 노숙자는 “끼니를 잇기 위해 갖고 있던 주민등록증을 10만원에 팔았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노숙자들은 “지존파나 조세형같은 이들이 나와야 한다”는 극언도 서슴지 않고 있다.

▼ 당국의 탁상행정 ▼

노숙자들의 집결지역인 서울역 일대에는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취업 및 심리상담기관이 한군데도 없다. 서울 영등포 근로자합숙소 취업상담실에는 인력은행의 전국적 구인정보를 조회할 펜티엄급 컴퓨터가 있으나 사용인가를 가진 공무원이 없어 그냥 놀리고 있었다.

개인정보가 담긴 구인정보는 공무원만 취급할 수 있는데 서울시가 공무원 파견을 미루고 있어 결국 실직자가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시가 합숙소 운영비를 제때 지원해 주지 않아 합숙소측은 조계종단 사회복지재단으로부터 5백만원을 융통, 운영경비로 쓰고 있다.

<선대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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