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ighting②]직장 분위기가 달라졌다

  • 입력 1998년 2월 9일 20시 15분


감원태풍이 몰아치고 있는 일터. 찬바람이 부는 동료의 빈자리. ‘살아남은’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어떻게 삭이며 ‘살 궁리’를 하고 있을까. ▼ 젊고 단정하게▼ 가르마 곱게 탄 고운 머리칼을 은근히 아껴온 쌍용그룹 김모차장(36). 2주전 ‘심기일전하고 좀 더 단정해보이겠다’며 스포츠형으로 머리를 잘랐다. 친구들은 “방위병 같다”고 놀리지만 회사에선 그런 농담은 없다. 짧은 머리가 혼자만이 아니기 때문. 사무실내 25명의 남자직원 가운데 뒷머리를 기계로 하얗게 깎은 사람이 지난해말부터 급격히 늘어 이제 절반을 넘어섰다. 젊고 힘있어 보이려는 간부들의 노력도 부단하다. 서울 무교이용원 김성철사장(47)은 “예전엔 ‘흰머리가 경륜있어 보인다’던 손님들의 염색이 부쩍 늘었다”고 전한다. 40대 중반부터 흰머리가 된 최모부장(50)은 “지난해 말부터 염색약을 사다 한달에 한번씩 염색하고 10년 넘게 입어온 베이지색 바바리 대신 젊어보이는 감색레인코트를 사 입고 다닌다”고 털어놨다. 스스로 직장생활의 의욕을 다지려는 노력이다. 그 속에는 ‘사소한 부분에서도 흠이 잡히면 안된다’는 자기점검이 깔려있다. 창업주 3세가 기조실장이 된 모그룹 주변에선 “실장(43세)보다 늙어 보이는 사람은 살생부의 ‘살’이다”는 썰렁한 농담이 떠돈 바 있다. ▼ 조직내 인화겸손 ▼ 튀는 아이디어로 두각을 나타내온 L사 기획팀 이모대리(31). 항상 자신감 있던(조금은 건방진듯한) 그는 최근 상사와의 대화기법을 바꿨다. 아이디어를 낼 때 예전에는 “분명히 히트할 겁니다”로 시작했으나 요즘은 “그렇게 독창적인 것은 못되지만”이란 겸양어를 앞에 붙인다. 칭찬을 받을 때도 “팀장님과 주위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덕분에”란 표현을 꼭 먼저 쓴다. 톡톡튀는 20대 팀원 5명을 통솔하는 팀장인 K기획 정모과장(35). 예전엔 각각 전문영역을 지닌 팀원들의 보고서를 받을 때마다 전문용어를 쉽게 이해하지 못해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요즘 들어 팀원들이 그래프나 도표, 친절한 설명을 담은 쉬운 표현을 많이 써줘서 편하다. 또 팀장에게 별로 기대할 게 없는 줄 알면서도 사전에 의견을 물어오는 팀원이 많다. 뭘 지시할 경우 “그건 힘들지 않을까요” 보다는 “알겠습니다.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대답이 훨씬 많다. 사실 정과장 스스로도 윗사람에게 더 공손해지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려는 본능적 변화를 느낀다. ‘더욱 사랑받는 직원’이 되려는 노력은 때론 아부, 무조건적 순종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직원 30명인 한 외국계 투자신탁회사의 김모과장은 “예전같으면 이견을 달만한 게 한두가지가 아닌데도 요즘엔 외국인 사장이 시키는 일은 끔뻑 죽어서 복명(復命)하는 직원이 많아졌다”고 한탄한다. 감원태풍을 겪으면서 “인맥으론 오래 못간다는 것을 실감했다”는 직장인도 적지 않다. 경제호황기엔 사주(社主)가 이왕이면 ‘측근’ ‘가신’(家臣)을 배려했지만 기업이 존폐위기에 처하자 능력 위주로 인사를 할 수 밖에 없어 어설픈 인맥보다는 철저하게 능력있는 사람만이 살아남는 긍정적 현실을 보게 됐다는 것. ▼ 자기 계발 ▼ 6일 밤10시반 뉴코아스포츠클럽 수영장. IMF시대엔 건강이 최대 자산이라며 심야수영으로 체력을 다지는 남녀 직장인들로 레인이 북적댄다. 어학이나 자격증 취득 공부를 시작한 직장인도 한둘이 아니다. S사 김모과장(34)은 한의대진학을 목표로 위성과외 방송을 듣기 시작했다. 이번 자기계발 열기의 특징은 일과(日課)외 활동임에도 회사일에는 더욱 철저하고 열심이라는 점. 직장생활10년째 인강모차장. “‘빈자리’를 보면서 정작 중요한 것은 회사라는 조직이 아니라 내가 맡은 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며 “일 그 자체, 성취감에 대해 한없는 애정이 샘솟는다.” L그룹 장모과장. “내 일을 통해 누군가가 작은 행복감을 느끼거나 고마워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힘이 넘치던 신입 사원 시절의 신선한 기분을 되새기고 있다.” 〈이기홍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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