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구나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막상 그 행복한 삶의 실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도 쉽사리 대답을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행복과 불행을 갖고 안 가진 것, 즉 소유로 가늠하고 있다고 하겠다.
―남은 저렇게 출세를 잘 하는데
―남은 저렇게 돈을 잘 버는데
―남은 저렇게 이름을 날리는데
왜? 나는 이렇듯 출세도 못하고 가난하고 인기나 존경을 못받느냐고 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암울해하고 불행을 느끼는 초점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글에서 독자들과 함께 생각해 보려는 것은 모든 이들이 그처럼 행복의 실체라고 여기는 그 소유라는 것이 그렇듯 다행하기만 한 것이냐 하는 점이다. 위에서 이미 세가지로 열거하였듯 소유란 출세나 권력과 같은 물리적 소유와 돈벌이나 재산과 같은 물질적 소유, 그리고 명예나 인기와 같은 정신적 소유가 있다.
그러면 첫째, 출세나 권력이라는 물리적 소유면에서 우리 나라에서의 정점(頂點)은 말할 것도 없이 청와대 주인이 되는 것인데 바로 그 자리에 올라있던 주인공들이 다행만 했었느냐 하면 입에 올리기도 저어되는 바 오히려 거의 비극적이었던 것은 만인이 다 아는 바다.
둘째, 재물이라는 물질적 소유인데 소위 우리의 굴지의 재벌들은 그 재산때문에 부자 모자 형제 숙질 또는 친척간에 송사를 벌이고 원수사이가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듣고 있다. 아무리 고량진미의 밥상을 앞에 놓고라도 부자간 형제간이 저렇듯 재산싸움을 하면서야 어찌 입맛이 있으랴.
셋째, 그러면 인기나 존경과 같은 정신적 소유라는 것은 괜찮기만 하지 싶지만 그것도 겉으로 보듯 결코 다행하지만은 않다. 이 역시 손쉬운 예로 요새 흔히 이름을 날리는 운동선수나 TV탤런트들의 인기라는 것도 겉으로 보기엔 재능이나 면모만 갖추면 수월하고 화려한 것 같지만 그들이 그 인기를 얻고 유지하기 위한 강훈(强訓)을 비롯한 육체적 정신적 고역이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마저 할 수 없는 정도인 것이다. 그리고 한편 인격적 존경이나 인망과 같은 정신적 소유는 아주 태평스럽고 안전한 것으로 오해를 하지만 가령 비구나 비구니, 신부나 수녀같은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만나면 그들의 고결한 삶에 존경을 바치지만 그 인간적 초탈의 첫 조건인 ‘동정(童貞)’ 즉 일생을 독신으로 성욕을 끊고 지내야 한다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우리 일반인으로는 상상도 못할 내면적 갈등과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물론 그렇다고 소유 그 전부가 불행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고 모든 사물에는 명암(명암)이 있듯이 소유에도 밝고 어둡고 좋고 나쁜 두 면이 있음을 철저히 인식하고 또한 그 소유가 크면 클수록 어둠도 정비례하여 커진다는 것을 깨우치자는 이야기다. 한마디로 말해 존재 자체에서 찾아내고 누려야 한다고 말하겠는데 그 이로(理路)대신 ‘정두리’라는 주부시인의 ‘빨래’라는 시 한편을 음미해 보기로 하자.
햇살 고운 한낮 구부리고 앉아
나불대며 쏟아지는 수도물의 수다를 듣는다.
피곤이 모인 셔츠 언저리
아가의 내음이 남은 작은 저고리
한줌 한줌 물에 적시고 꺼내는 손놀림은
때론 눈 먼 나, 나태한 여자의
이름을 불러 일깨우고
여자의 가장 맑은 얼굴을 보는 자리
아낙의어진 정성이뽀얗게피는 시간
소담스러이 빠짐없이 나의 빨래를
건져내어 힘주어 짜며
햇살에 빛나며 날리는
내 일월을 보리.
우리는 여기서 이 시를 소유의 세계만으로 보고 생각한다면 모두가 전기세탁기를 사용하는 요즘 저렇듯 손빨래를 하는 것은 능률이나 수고면에서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 주부의 처지가 가엾기까지 하다. 그러나 존재의 세계, 즉 변전하는 현상속에서 불변하는 실재(實在), 다시 말해 남편이나 아가에게 향한 사랑이 그 수고라든지 능률이라든지의 문제를 넘어서서 자기의 삶의 보람과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충족감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무소유의 행복’을 설파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듯 삶의 참된 행복은 소유가 아니라 그 여건(與件)의 양부(良否)를 존재와 그 존재가 지니는 신비속에서 스스로 찾아내고 누리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앞에 가로 놓인 경제난국이 우리 삶의 근원적 전환을 가져다 주기를 오히려 바라는 바이다.
구상(시인·예술원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