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窓]어느 명퇴 가장의 죽음

  • 입력 1997년 6월 17일 19시 48분


「정말 그렇게 가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난 95년 7월 30년 넘게 다니던 국영기업체에서 명예퇴직한 박모씨(52). 안정된 직장을 다니던 박씨는 하루 아침에 말로만 듣던 「명퇴자」가 되었지만 좌절하지 않았다. 퇴직금으로 2억7천만원을 받았고 집도 있었다. 열심히 살면 슬하에 1남3녀를 남부럽지 않게 결혼시키고 아내와 함께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만은 않았다. 박씨는 명퇴후 모 중소건설회사에 명예이사로 들어갔지만 얼마못가 불경기를 견디지 못하고 부도를 내 투자금 3천만원만 날렸다. 박씨는 이어 서울 마포구 망원동에 상가건물을 짓기로 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돈과 경기 의정부에 있던 집을 판 돈 1억5천여만원, 은행대출금 등 10억원을 들여 연면적 2백여평에 5층규모의 상가를 지었다. 하지만 경기불황으로 분양이 되지 않았다. 이자는 불어만 가고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박씨는 궁리끝에 어떻게든 빚을 줄여 보려고 3개월전부터 자판기 사업을 시작, 자유로 부근 주유소와 통일전망대에 자판기 4대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일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박씨는 시가 12억원짜리 건물을 8억원에 급매, 빚을 갚았다. 박씨는 지난 12일 오후 평소와 다름없이 집을 나선 뒤 사흘이 지나도록 귀가하지 않았다. 박씨의 딸(24)은 15일 오후 자유로로 박씨를 찾아 나섰으나 「매진」표시가 붙은 자판기만 발견했다. 돌아오는 길에 박씨의 딸은 우연히 자유로 길가에 아버지의 차가 주차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 순간 『빚만 다 갚으면 죽어야지』하고 깊은 한숨을 토해내던 아버지의 모습이 퍼뜩 떠올랐다. 다음날 경찰과 함께 박씨를 찾아나선 가족은 자유로에서 1백50여m 떨어진 산중에 목을 맨 채 숨져 있는 가장을 발견했다. 〈신치영기자〉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