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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암살범 안두희…범행진상 입다문채 도피의 한평생

입력 1996-10-23 20:51업데이트 2009-09-27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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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피살된 백범 金九선생 암살범 安斗熙씨의 일생은 「진실」과 「국민적 공분 」을 피하기 위한 끊임없는 잠행과 도피의 연속이었다. 백범을 암살할 당시 그는 32세의 육군포병 소위였다. 49년 6월26일 낮 12시경 경 교장 2층의 거실에서 安은 백범을 향해 4발의 총탄을 쏘았다. 그는 즉시 특무대 지 하실로 연행됐으나 정부와 군당국은 그를 철저히 보호했다. 수많은 민중이 애국지사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피끓는 울음을 토해내는 그순간 安 은 오히려 「安의사」로 불리며 「시역의 고민」이라는 수기까지 집필했다. 엄청난 의혹 속에 백범암살은 安의 「단독범행」으로 「정리」됐다. 安은 범행 두 달 뒤인 49년 8월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그 후 석달만에 징역15년으로 감형됐다. 게 다가 복역중 2계급 특진까지 하기도 했다.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이 그를 돌보고 있었다. 그는 50년 6.25전쟁이 터지자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아 다시 포병장교로 복귀했다 가 전투도중 부상하고 51년 대위로 제대했다. 잠시 서울 명동의 모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근무하다 56년 6월 강원 양구면에 군납 공장을 지어 군대부식을 공급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 그러나 4.19로 그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했다. 「金九선생 살해 진상규명투쟁 위원회」가 발족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잠행을 시작한다. 그러나 잠행 1년만인 61년 4월19일 진상규명위 간사였던 金龍熙씨에게 붙잡혀 경 찰에 넘겨졌으나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곧 풀려났다. 그러나 그는 「역사의 시효」에서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이 계속 그의 뒤를 쫓았다. 65년 민통련인권국장을 지낸 郭泰榮씨로부터 칼로 두군데나 목을 찔렸으나 극적으 로 살아난 그는 이후 약 10년동안 부인 朴모씨 및 3남2녀(현재 모두 미국 거주)와 함께 수십차례 거처를 옮기면서 「필사적인 은신」을 계속했다. 몇차례 미국 이민을 시도했으나 『해외도주를 막아야 한다』는 비난여론으로 번번이 무산되기도 했다. 장성한 자녀들은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못이겨 하나 둘씩 미국으로 떠났고 부인 朴모씨는 77년 합의이혼했다. 86년 金明姬씨(64)와 재혼, 특별한 생계수단없이 자녀들이 미국에서 보내오는 돈 으로 생활해 온 그는 나이가 들면서 외로움을 못견딘 듯 경로당에 나가 『내가 안두 희다』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한때 잊혀진 安씨는 87년 權重熙씨(60)로부터 몽둥이로 맞으면서 다시 세인의 이 목을 끌었다.그러나 그는 중풍에 걸려 손과 다리를 떨면서도 『진상을 고백하라』는 추궁에는 묵묵부답이었다. 지난 92년 2월28일 權씨에 의해 거의 「반강제」로 서울 효창공원내 백범묘소 앞 에 이끌려 와 뒤늦은 회한의 울음을 토해냈지만 열릴듯 말듯 하던 그의 「입」은 끝 내 열리지 않았다. 현대사의 의문부호로 남아 있던 金九선생 암살은 이제 安씨의 죽음으로 더욱 풀기 힘든 미궁속으로 빠져들게 됐다.〈李明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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