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비례대표들의 명분 없는 ‘지역구 사냥’ [김지현의 정치언락]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22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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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총선 시즌이 다가오긴 했나 봅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요즘 여의도에는 출마 예정자들의 지역사무소 개소식 초대장이 쏟아집니다. 내가 이 지역구에서 뛰겠다고 알리는 예고편이죠. 그중에서도 요즘 더불어민주당에선 지난 총선 때 비례대표로 국회에 들어온 의원들의 ‘지역구 사냥’을 두고 말이 많습니다.

비례대표는 다양한 직군의 전문가와 소수자의 원내 입성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당연히 두 번 연속 비례대표 공천을 받기는 쉽지 않죠. 비례대표 출신들이 다음 총선 이후에도 살아남으려면 출마할 지역구를 미리 점찍고 선거를 준비해야 하는데, 이번에 유독 이미 같은 민주당 현역 의원이 버티고 있는 지역구에 도전장을 낸 경우가 많은 겁니다. 이 바닥 관례상 이른바 ‘상도의’ 없는 출마 선언이 이어지면서 벌써 갈등이 불붙은 지역이 적지 않습니다.



경기 남양주을
지난 14일 민주당 경기 남양주을 지역위원회 소속 시·도의원 7명은 ‘명분 없고 지역민을 무시한 김병주 의원의 남양주을 출마 선언’이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내고 비례대표인 김병주 의원의 남양주을 출마를 공개 반대했습니다. 남양주와 아무 연고도 없는데 왜 나오냐는 거죠.

경북 예천이 고향인 김 의원은 강원 강릉고 출신으로 지난 총선 때 강원권역 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뛰었고, 현재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살고 있습니다. 육군 장성 출신인 김 의원은 “육사 생도 시절 남양주 별내로 행군을 자주 했다. 현재 사는 공릉동도 남양주와 가깝다”라고 출마 사유를 밝힌 바 있습니다.

21대 총선을 앞두고 2020년 3월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2번이었던 김병주 의원(가운데)이 당시 송기헌 강원 원주을 후보(현 의원), 이광재 강원 원주갑 후보(현 국회 사무총장)과 함께 원주 공동 공약 발표회에 참석해 웃고 있다. 김 의원은 강릉고를 졸업했으며, 총선 당시 강원권역 선대위 부위원장으로 뛰었다. 이광재 페이스북
한 민주당 관계자는 “김병주 의원이 지역 연고를 살려서 경북 예천이나 강원 지역으로 출마하거나, 군 출신인 경력을 살려 경기도 포천 등 접경 지역으로 출마했으면 모두가 응원했을 것”이라며 “왜 굳이 민주당 현역인 김한정 의원(재선)의 지역구인 남양주을을 고른 것인지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라고 하더군요. “아무래도 경북 예천이나 강원이나 군 접경 지역 모두 국민의힘 강세 지역이니 민주당 텃밭 중 고른 것 아니겠냐”고도 했습니다. 지난 대선 때 남양주을에선 민주당이 전국 평균보다 높은 53.82%를 득표했습니다.

올해 1월 설 연휴를 앞두고 경기 파주 소재 방공부대를 방문한 이재명 대표와 김병주 의원(오른쪽 두 번째). 비례대표 출신인 김 의원은 다음 총선 때 경기 남양주을 출마를 최근 공식화했다. 김병주 의원 페이스북
김병주 의원은 지난해 이재명 대표 출범 직후 제2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았던 ‘친명’ 의원입니다. 김한정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 비서실장 출신으로 상대적으로 계파색이 옅은 편이죠. 한 민주당 관계자는 “김병주 의원이 최근 민주당 상임위 간사단 연석회의가 끝나고 다 같이 나오는 길에 김한정 의원을 붙잡고 남양주 출마 계획을 알렸다고 한다”라며 “갑작스러운 통보에 김한정 의원도 크게 당황했다더라”라고 전했습니다.

경기 광명을
경기 광명을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환경 운동가이자 재생에너지 전문가로 국회에 입성한 비례대표 양이원영 의원은 다음 달 3일 광명에 지역사무소를 연다고 밝혔습니다. 광명을은 광명시장 출신인 민주당 양기대 의원의 지역구죠. 양이 의원은 지난 1월 설 명절을 앞두고 양 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출마 계획을 전했다고 합니다.

양이 의원도 광명에 딱히 연고는 없습니다. 지난 2019년 양이 의원의 모친이 광명 신도시 일대 주변 토지를 사들인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투기 의혹이 일었던 적은 있습니다. 양이 의원은 앞서 3월 말 광명지역 언론과 만난 자리에서 왜 광명을로 출마하느냐는 질문에 “광명시는 탄소중립 정책과 친환경에너지 쪽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라고 답했더군요.

양이 의원은 울산 출신으로, 지난 국민의힘 전당대회를 앞두고 김기현 대표의 울산 KTX 역세권 개발 특혜 의혹을 앞장서서 제기했었죠. 양이 의원이 그동안 원전 전문가라고 스스로 홍보했던 만큼 원전이 몰려있는 울산으로 출마했더라면 출마 명분이 더 확실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울산이 민주당엔 험지이니 아무래도 가시밭길은 피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네요. 광명시는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52.50%로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44.20%)를 크게 앞섰던 곳입니다.

양이 의원은 강경파 초선 의원 모임인 ‘처럼회’ 소속으로 강성 친명으로 분류되죠. 양이 의원은 14일 민주당 쇄신 의원총회에서 이재명 대표의 재신임을 요구했던 비명계 양기대 의원을 향해 다음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본색을 드러내시는군요. 그동안 무슨 일을 하셨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오히려 본인들이 당원들에게 재신임받아야 하는 상황 아닌가요?”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양이원영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쇄신 의원총회 다음날인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의총에서 이재명 대표 재신임을 요구한 양기대 의원 등 비명계 의원들을 겨냥해 올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양이원영 페이스북
양이원영 의원이 더불어민주당의 쇄신 의원총회 다음날인 15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의총에서 이재명 대표 재신임을 요구한 양기대 의원 등 비명계 의원들을 겨냥해 올린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양이원영 페이스북


전북 군산
역시 처럼회 소속 김의겸 의원도 지난달 13일 국회에서 “내년 총선에 고향인 군산에서 출마하겠다”라며 군산 출마를 공식화했습니다. 군산은 민주당 비명계 신영대 의원의 지역구입니다. 김 의원은 지난 총선 때도 군산으로 출마하려다 부동산 투기 의혹이 불거지면서 민주당 후보로 아예 출마를 못 했습니다. 이후 열린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뒤 열린민주당이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 소속 비례대표가 된 케이스입니다.

부동산 투기 논란 속에 21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했던 김의겸 의원이 2020년 2월 신영대 의원(당시 후보)을 찾아 지원을 약속했다. 김 의원은 이후 한 달 만에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신영대 의원 페이스북
부동산 투기 논란 속에 21대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했던 김의겸 의원이 2020년 2월 신영대 의원(당시 후보)을 찾아 지원을 약속했다. 김 의원은 이후 한 달 만에 열린민주당 비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린 뒤 21대 국회에 입성했다. 신영대 의원 페이스북
김의겸 의원은 위 사례들과는 달리 지역 연고는 확실합니다만, 비명계인 신영대 의원과 세게 붙으면서 진영 간 갈등으로 확산할 조짐을 보여 왔습니다. 김의겸 의원은 민주당의 첫 대규모 장외투쟁 집회가 열렸던 지난 2월 군산에 내려가 지지자들과 만나 사진을 올려 논란이 됐었죠. 마침 당시가 ‘개딸’ 등 이 대표 강성 지지층이 ‘수박 지역구’라며 비명계 의원들의 지역구를 찍은 뒤, 해당 지역에 출마하기로 한 친명 인사들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던 때였습니다. 신 의원 등 비명계 의원들이 당 지도부에 ‘벌써 비명계 공천학살이 시작된 것이냐’고 항의했고 결국 이 대표가 직접 나서 김 의원 등을 겨냥해 “지역에서 내 이름을 팔고 다니지 말라”고 이례적으로 경고했죠.

이밖에 역시 처럼회 멤버인 비례대표 유정주 의원도 서영석 의원의 지역구인 경기 부천정 출마를 공식화했습니다. 현역 의원은 아니지만 지난 대선 경선 때 이재명 캠프 대변인을 지냈던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도 비명계 윤영찬 의원 지역구인 성남중원에 도전장을 냈고요. 제주 서귀포 출신으로 지난해 보궐선거 때만 해도 제주을에 출사표를 던졌던 현 부원장은 지난 15일 성남에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선거 준비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모양입니다.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지난해 5월 제주도의회에서 “언제나 제주도민만을 생각하겠다”라며 제주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알리는 모습. 결국 당시 제주을 보궐선거에는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이 전략 공천돼 당선됐다. 제이누리
현근택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지난해 5월 제주도의회에서 “언제나 제주도민만을 생각하겠다”라며 제주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출마를 알리는 모습. 결국 당시 제주을 보궐선거에는 더불어민주당 김한규 의원이 전략 공천돼 당선됐다. 제이누리
선거구 획정이 어찌 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총선은 전국 253개 지역구를 두고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 거대 양당이 땅따먹기하는 구도입니다.

한 중진 의원은 “비례대표는 어쨌든 당의 배려를 받아 국회에 입성한 것 아니냐. 그러면 다음 총선 때는 ‘선당후사’의 정신으로 험지에 도전하거나, 국민의힘 지역구에 출마해야지, 어떻게 민주당 현직 의원들의 수도권 지역구에 줄줄이 나가나”라고 혀를 찼습니다. 국민의힘 현역 의원 지역구를 빼앗아 와도 모자랄 판에 왜 제 살 깎아먹기하듯 민주당 지역구에서 싸우냐는 거죠.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서로 ‘디스전’을 벌이면 결과적으로 국민의힘만 좋은 일 시키는 꼴이라는 겁니다.

이번에 유독 현역 의원 지역구에 도전장을 던지는 비례대표가 많은 것을 두고 당 지도부의 리더십 상실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큽니다. 한 재선 의원은 “원래 당이 비례대표들의 출마 지역이 서로 꼬이지 않게 교통정리를 당연히 해주는 게 맞다. 그런데 지금 지도부는 당 대표 사법 리스크에 대응하기 바빠서인지 각자도생식으로 내버려 두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마침 위 사례들의 공통점은 ‘이재명 측근’ 타이틀을 내건 친명 후보들이, 민주당이 우세한 텃밭 지역, 그중에서도 특히 비명 또는 계파색이 옅은 현역 의원들의 지역구에 도전장을 냈다는 거죠. 차라리 이들이 강성 친명 의원 지역구에도 도전장을 냈더라면 잡음이 좀 덜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게 ‘명분’이라고들 하죠. 내가 왜 이 선거에 나오려고 하는지, 나와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가 명확하고 설득력이 있을 때 그 자체가 원동력이 돼서 승리로 이어지는 겁니다. 이재명 대표가 지난해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최측근들조차 격하게 말렸던 이유가 출마에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때의 꼬리표가 지금까지도 그를 따라다닌다는 점을 비례대표 의원들도 잘 새겨야 할 것 같습니다.

김지현기자 jhk8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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